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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좀비라도 좋다!
권리(소설가) 2006-07-14

4년 전, 영국을 여행할 때였다.

에든버러의 ‘호그마니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12월31일 자정, 차가 완전히 통제된 드넓은 프린세스 거리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새해를 알리는 소리에 사람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꼬리잡기하듯 긴 줄을 만들어 반대편 사람과 포옹하며 새해를 축하했다. 내 앞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이 뒤에는 타이인이 있었다. 낯선 백인 남자가 “Are you chinese?” 하며 나를 부둥켜안는 것도, 엄청나게 긴 화장실 줄도 다 용서가 되었다. 인종과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대형 축제의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내로라할 축제가 없었던 한국에서 온 내게 그 축제는 충격과 자극, 부러움을 동시에 주었다.

그리고 2002년과 2006년. 우리에게도 축제가 생겼다. 사실 난 단 한번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응원 나간 적이 없었다. 월드컵 열기에 부화뇌동해 반짝 축구 마니아가 되기도 싫고 지나친 애국주의 대열에 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규칙 하나 제대로 모르는 ‘축맹’인 내게 축구 경기는 이런 홈쇼핑 광고처럼 들렸다. “페널티킥, 오프사이드, 핸들링 3종 세트를 저렴한 가격에 모십니다. 지금 바로 전화주세요!”

어째서 다들 축구에 미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은 꼭 직접 실험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게 2006년 독일월드컵은 적절한 실험 대상이었다. 한국 대표팀의 세 번째 경기인 스위스전 때 나는 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광장은 신기(神技)를 초월하는 이상한 무드에 사로잡혔다. ㄱ자로 서서 1시간은 기다려야 내 차례가 오는 화장실이나, 코스프레를 연상케 하는 과감한 의상은 도무지 생소할 따름이었다. 뒤에선 쉼없이 스타에 열광하는 여고생들의 ‘악!’ 소리가 들리고, 옆에선 동향(同鄕) 사람들끼리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시청 광장은 세대나 인종, 시간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새벽 4시가 가까워질 무렵에도 사람들은 <오! 필승 코리아> <애국가> <Reds, go together> 등을 연창했고 나는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녹아 흘러내리는 시계가 시청 광장 어딘가에서 똑딱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저들은 끓는 피를 그동안 어떻게 주체하고 있던 것일까? (헌혈하는 데 썼나?) 나를 포함한 응원 인파는 철판 위의 스테이크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지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 4시. 시종일관 시끄럽던 광장 안은 경기가 시작되자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오히려 조용해졌다. 골이 들어갈 듯 말 듯한 골문은 사랑하는 사람이 열어주지 않는 마음만큼이나 야속하게 느껴졌다. 경기 내용에 비해 쉽사리 터지지 않는 단 한골과 편파적인 판정이 이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처럼 골에 대한 집착은 심해져갔다. 그러나 집착과 병의 함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듯 경기는 예상만큼 잘 풀리지 않았고 주심의 석연찮은 판정에 스위스의 두 번째 골이 확정됐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떠버렸다. 경기를 끝까지 관전한 사람들 역시 끝내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지닌 채 광장을 나서야 했다.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쓰레기를 치우고 충정로를 지나 서소문 고가도로를 힘없이 걸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28일 후…>에서 텅 빈 도시를 걸어가는 한떼의 좀비 같았다. 모든 걸 소진하고 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축 처진 표정과 걸음이었다. 승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축제는 화를 녹이고 열을 발산시킨다. 이기고 지는 문제는 축제의 화학작용에 의해 녹이면 그뿐이다. 경기엔 졌지만 우린 축제를 가지지 않았는가?

난 아직도 패널티킥과 프리킥이 헷갈린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공을 차고 싶단 생각에 발이 간질거리는 증세도 내겐 없다. 하지만 축제가 있는 한 나는 다시 시청 광장을 찾을 것 같다. 만일 4년 뒤 월드컵에서 어떤 불행으로 인해 한국 팀이 다시 지게 되더라도 에든버러의 그들처럼 우리도 시청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 축제를 밤새 즐겼으면 좋겠다. 좀비라도 좋다. 울고 웃고 뛰고 열내고 춤출 수 있는 광장. 그곳이 그리워 4년 내내 발이 간질거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