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어떻게 희망이 되는가
6월22일 저녁. 어린이대공원 후문쪽으로 꺾어 들어서자마자 작은 트럭 앞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투쟁 2주년 문화제” 휠체어에 몸을 기댄 장애우들과 관련 시민단체 회원들 50, 60여명이 한국소아마비협회 복지 기관 정립회관의 민주화를 위해 농성을 벌인 지 2년째 되는 날을 기념하고 있다. 공원 폐장 시간에 쫓겨 아이들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던 엄마들은 궁금한 눈초리를 던지고, 술에 취한 행인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연신 박수를 친다. 잠시 그 풍경을 쳐다보고 있던 기자에게 다가와 문득 던지는 태준식 감독의 한마디. “기사 떨어지면 한번씩 다큐멘터리 취재하는 아마 그때가 됐나 보네요?” 친근하게 웃으며 별 의미없는 농담이라는 듯 말했지만, 만나자마자 받은 말이 비수에 가깝다.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지만, 그 순간에는 막상 응대할 말이 없다. “제가 사운드 체크를 좀 해야 돼서요”라며 급하게 대오쪽으로 향하는 그를 쫓아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본다. 그 대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 막무가내로 친한 척하며 연출자를 쫓아다니는 게 영화 현장 취재의 한 방법이라지만, 왠지 무거운 마음이 다리를 잡고 영 놓아주지를 않는다.
몇 차례의 성명 발표와 공연이 지날 때쯤 <필승 연영석>의 주인공인 연영석씨가 도착하고, 포장마차 떡볶이와 튀김 한 접시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던 태준식 감독이 달려나가 마중을 한다. 공연 전 기타를 조율하고 있는 연영석씨에게 태준식 감독이 취재진의 존재를 알리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가까이에서는 찍지 마세요. 얼굴이 못생겨서요. (웃음)”라며 농담을 던진다. 자신이 하는 창작물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창작자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수 연영석은 꼭 그의 노래처럼 단단하면서도 훈훈한 사람 같아 보인다.
둘 사이에 벌어진 흥미로운 “신경전”을 엿보게 된 건 연영석씨가 <구르는 돌> <간절히> 등 두곡을 열심히 부르고 물러난 트럭 무대 뒤편에서다. “나는 놀러가는 건데 카메라 갖고 따라오면 아무래도 내가 못 놀지….” 태준식 감독이 어딘가 따라가겠다는 걸 연영석씨가 약간 꺼리는 눈치다. 무슨 승강이일까. “영석이 형이 후지록페스티벌에 놀러가거든요. 나는 쫓아가려고 하고 영석이 형은 놀러가는 데 뭐 하러 오냐, 올 거면 카메라를 놓고 와라 그러는 거고, 나는 부담 안 주고 알아서 하겠다, 뭐 이러는 거고. (웃음)” 찍는 대상과 관계 맺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도 훈련된 연기자가 아닌 생활인들의 삶 자체를 좇는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는 역시 매사가 고비가 되겠다는 생각이 그 말을 들으면서 잠시 스친다. 과연 태준식 감독은 후지록페스티벌에 카메라를 들고 연영석씨와 동행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다음날 낮, 종로 보신각 앞. <필승 연영석>의 주인공으로는 가수 연영석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준식 감독은 가수 연영석의 음악을 들으며 힘을 얻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영화의 또 다른 한축으로 두기로 했다. 오늘은 그중 한명인 KTX 여승무원을 만나러온 날이다. “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회 및 철도공사 직접고용 쟁취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 직접해결촉구결의대회.” 햇볕은 약하지만, 찜통 같은 날씨. KTX 여승무원들과 그녀들의 부모와 연대의 의미로 참석한 다른 노조원들이 바닥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들 곁으로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녀들이 하나둘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몇 시간 뒤면 한국과 스위스의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아마 그때쯤 이곳은 붉은 티셔츠의 물결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보신각 종 건너편 대기업 건물에 걸려 있는 커다란 월드컵 광고들이 눈을 휘어잡는다. 태준식 감독은 놓치지 않고 그걸 훑어 내려가며 찍어가고 있다.
“알아가는 중이라 좀 조심스럽다”며 소개한 오늘의 주인공은 KTX 부산승무지부 부지부장 노은영씨. 한눈에 척 봐도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노래 부르고, 대오 앞에 나와 율동을 선보이고, 촬영 중인 태준식 감독을 찾아 물통을 가져다준다. 쾌활한 사람 같다고 말하자, 태준식 감독이 대답한다. “그런 사람 있잖아요. 뒤치다꺼리 혼자 다하고 밤에는 힘들어서 혼자 울고 하는. 인터뷰하는데 내내 울어서 힘들었어요. 저런 친구들이 속에 쌓인 게 많잖아요.” 그녀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한 청을 흔쾌히 승낙한 것도 KTX 사태를 더 알려야 한다는 노조 간부로서의 책임감이 발동했을 것이라고 태준식 감독은 추측한다. 시간이 지나고, 노은영씨와 KTX 여승무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 풍선에 각자의 소망을 적어 거리집회를 할 채비를 하자, 태준식 감독 역시 가르치는 학생들 성적처리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철수를 서두른다. 이틀 동안 잠시 현장을 보았으니 이제 물을 말이 남았다. 그를 붙잡고 <필승 연영석>의 나머지 이야기를 듣는다.
<필승 연영석>. 솔직히 제목은 누가 봐도 좀 촌스럽다. 주인공 연영석씨도 “처음엔 제목이 뭐 그런가”싶었다. 누군가는 “<달려라 연영석>이냐고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절함이 있다. <필승 연영석>은 2003년에 만든 <필승 주봉희>를 잇는 ‘필승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머리에 “파견 철폐”를 염색하여 새기고 다니던 비정규직 활동가 주봉희씨의 이야기에 이은 두 번째 다짐인 셈이다. 그리고 딱딱한 집단의 구호에 의미를 두기보다 그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행적에 마음을 돌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가슴이 식어서 그런 건지 세상이 별로 변하지 않았고, 우리는 자꾸 패배한다고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다짐 같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필승’이라는 제목에 담긴 간절함이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노동자뉴스제작단을 나와 몇년간 이런저런 직업을 옮겨다닌 뒤 지난해 태준식 감독은 마침내 평소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록다큐멘터리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부산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기금을 받은 것도 힘이 되었다. “영석이 형의 음악은 기존 노동가요하고 많이 달라요. 단결, 투쟁, 연대 이런 걸 강조하기보다 사회 속에서 소외받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성찰을 형식적 완결성으로 담아내요. 일단 록다큐멘터리를 하겠다고 정했다면 음악이 주는 무게감도 그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석이 형 음악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기에 노은영씨와 같은 상황에 처한 몇명의 주인공을 같이 묶을 생각을 한 것이다. 이를테면, <필승 연영석>에서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살아가는 또 다른 개인들의 삶이 중요하다. 그래서 “레이크 사이드의 나이 많으신 어르신, 그리고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20대 젊은 청년, 그리고 한 군데 더 비정규직 사업장에서 투쟁하는 개인을 담을 생각”이며, 그들과 연영석의 음악을 매치시키는 형식적 구성을 생각 중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영석이 형의 음악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현실은 과연 어떤지, 그리고 그 음악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고 싶어서 만드는 영화에요. 기존의 독립다큐멘터리와 나름대로 선을 좀 긋고 가고, 형식적인 완성도를 추구한다고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독립다큐멘터리란 세상과 친밀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다소 떨어지는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세상과의 친밀함에서 나오는 힘이 있지만, 만드는 사람의 기획력이나 창작력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작품도 있을 수 있어요.”
형식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혹은 기존 독립다큐멘터리의 오명을 벗어버릴 새로운 시도. <필승 연영석>의 또 다른 목표치다. 그리고 그 목표는 온당하다. 그의 말처럼 정교한 울림을 지닌 다큐멘터리가 더 많이 나올 시점이 된 것이다. <필승 연영석>, 이제 80%의 촬영을 마쳤으니 그 결과물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첫 상영일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 이것 말고 지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필승 태준식!
“하고 싶은 음악을 지켜내기만 해도 성공이다”
민중가수 연영석 인터뷰
연영석은 뮤지션이다. 그리고 문화 활동가다. 태준식 감독의 말처럼 그의 음악은 투쟁이나 연대 같은 “거대 담론”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소박함이 있다. 처음에는 다들 “그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태준식 감독이 보기에 지금은 오히려 “안 보는 척하면서 포즈를 잡는 것 같다(웃음)”. 그만큼 합이 잘 맞는다. 그 연영석에게 <필승 연영석>에 대해 물었다.
-카메라를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촬영을 허락하게 됐나. =지난해 가을쯤 후배를 통해서 준식씨가 나를 찍고 싶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그래서 만났다. 처음에는 무슨 제목이 <필승 연영석>이라고 해서 좀 그랬다. (웃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도,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싶어서.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게 운동이 아니다. 세상이 나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게 운동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 나는 더 대단한 것 같다.
-카메라가 부담스러울 때는 없나. =왜 없겠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른 동지들이 어 또 찍네 그런다. 나 역시 매체하고 인터뷰하고 카메라에 찍히고 나면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았다. 자기들 필요한 것만 딱 따서 이상하게 쓰니까. 하고 나면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준식씨 작업은 좀 다른 거다. 같이 창작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허락한 거다. 내가 그런 작업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도와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다.
-음악적으로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지켜내기만 해도 내 자신에 맞는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장에서의 공연 자리야말로 참 좋다.
-주인공으로서 <필승 연영석>이 어떤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나. =내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건 감독 몫이니까. 아무쪼록 준식씨가 바라는 영화대로 잘 나왔으면 좋겠다. 가을에 콘서트를 하나 할 생각인데 준식씨가 “되도록 땡기시면 안 돼요?” 하는 걸 보면, 그때쯤을 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