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히다
김경욱/ 영화평론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강우석의 <한반도>를 보고 가장 먼저 갖는 느낌은 혼란 그 자체이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인물은 평면적이며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대중적 환상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강우석은 지난 10여년 동안 대중의 흥미를 정확하게 읽어낸 충무로 최고의 흥행감독이며, 따라서 ‘대한민국 본격 팩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한반도>는 미학적 관심보다 새로운 흥행기록을 목표로 한 강우석의 2006년 ‘한반도’ 읽기에 더욱 흥미가 간다.
여기 영화와 현실의 역사의 선 두개가 있다. 시작은 동일하다. 1910년의 한일합방. 그 다음 끝도 동일하다. 아직 오지 않은 2006년 7월13일. 영화와 현실은 큰 차이없이 진행되어온 것 같다. 양쪽 다 일제강점과 6·25전쟁을 겪었고, 그런 다음 분단되었다. 그래서 동일한 문제와 만난다. 통일을 향한 염원과 정치적 행동,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의 반대. 영화 <한반도>와 현실이 달라지는 지점은 구체적으로 2004년 5월14일 오전 10시다. 현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청와대에 복귀했지만, <한반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의 대통령이 되어 있으며 ‘지금’의 대통령(안성기)은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다. 강우석은 노골적으로 지금 여기의 정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일본의 침략이라는 위기 상황을 설정하고, 지금 우리가 100년 전, 한일합방 직전의 역사적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강우석은 고종황제와 2006년 대한민국 대통령 사이를 평행편집으로 번갈아 오가면서, 국가적 위기 앞에서 갈등하는 두개의 축을 제시하면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하소연한다. 여기서 두개의 축은 민족통일과 주권을 주장하는 대통령과 세계질서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요구하는 국무총리 권용환(문성근)이다. 이 둘은 한 국가 안에서 정치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를 대변한다. 국무총리가 현실의 목소리라면, 대통령은 영화의 목소리, 혹은 도래하지 않은 (강우석이 기대하는 대중의) 환상의 목소리가 된다. 영화는 환상의 목소리 편에서 진행 과정을 따라간다. 그런데 이 과정은 무시무시하다. 대통령은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내고 반대 의견을 일거에 침묵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한다. 하나는 마치 자살적 몸짓을 통한 자기 희생처럼 혼수상태에 빠지는 속임수이다. 그런 다음 그는 가장 좋은 시간에 부활한다. 두 번째 방법은 더욱 끔찍하다. 대통령은 고종황제가 봉인한 진짜 국새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도움을 얻어 정부청사를 폭파시킨다. 대통령 자신의 쿠데타? 구국의 영웅이 모든 민주적 절차를 단숨에 일소하는 장면이 <그때 그사람들>에서 심야에 경복궁 앞을 지나는 탱크장면보다 훨씬 폭력적으로 스펙터클하게 반복된다.
결말에 앞서 <한반도>는 모호한 두 장면을 제시한다. 하나는 찍지 않은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멈춰선 장면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주요 인물 가운데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동하는 인물은 단 한명, 국정원 서기관 이상현(차인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심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적 순간은 영화에 없다. 그래서 이상현은 마치 가면을 쓰듯 갑자기 돌변한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승리한 대통령은 패배한 국무총리에게 “이제부터 정말 필요한 사람은 당신”이라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듯 감싸안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블록버스터의 상식적인 컨벤션을 비웃듯) 국무총리는 뉘우치기는커녕 “결국 당신이 틀렸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모두가 대통령 편인 영화에서, 국무총리는 지지 않고 단호하게 그 말을 부정한다. 그 순간 영화는 얼어붙는다(freeze frame).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전환국면의 장면없이 슬그머니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온 이상현에게서, 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해소되지 않은 긴장 상태의 공존으로부터, 어떤 혼란을 보게 되는 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이러한 혼란이 강우석이 읽어내고 있는, 2006년 한국 민족주의의 환상적 곡예일까? 여기서 누가 정말 한반도를 위하는지, 누가 정말 옳은지 질문할 때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정답은 ‘둘 다 틀렸다’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자기 방식의 정답을 제시한 다음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한다. 그런데 정말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이며, 어느 것이 덜 나쁜 것인가? 불길한 암시. 그런데 왜 대통령은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을까?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달려오고 있는가?
감독 강우석을 중심으로 살펴본 <한반도>‘웃음’이 줄어든 만큼 ‘감동’도 줄다
변성찬/ 영화평론가
기대 반 우려 반의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심경으로 시사회장을 찾았다. 좀더 솔직히 그리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기대 2, 우려 8의 다소 조마조마한 심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우려는 어느 날인가 지하철역 영화 포스터에서 ‘사라진 국새’라는 문구와 대면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막연했던 우려는 시사회장이 가까워질 수록 점점 더 짙어져가는 조마조마함이 되었다. 문제는 역시 ‘국새’였다. ‘옥새’가 아닌 ‘국새’ 말이다. ‘국새’는 영화 <한반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것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의 산물이자,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욕망하는 거대 서사 공간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찾아낸 ‘절대 반지’이다. 차라리 끝까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는 절대 반지로 남아 있었더라면, ‘한번도 한반도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 한민족’의 원망(愿望)의 물신적 상징으로서의 아우라를 간직할 수도 있었을 법한 그 국새는, 끝내 ‘발굴’됨으로써 영화 <한반도>를 희비극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영화 <한반도>에서 ‘강우석’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던 ‘그’ 감독, 즉 ‘강우석다움’이 영화 <한반도>에는 없다.
감독으로서의 강우석을 잘 정의해주는 멋진 말이 있다. “시종일관 현실의 모순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가 싸움의 무기로 채택한 웃음은 90년대에 걸맞은 전략”이라는 정성일씨의 말이다. 물론 방점은 ‘현실의 모순’, ‘웃음’, 그리고 ‘전략’에 놓인다. <투캅스>(1993)로 대표되는 90년대의 그의 ‘코디미’ 작품들 앞에는 대부분 ‘사회풍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사회풍자코미디라는 그의 ‘전략’이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그가 영화적으로 창조해낸 ‘인물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때였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빚어내는 웃음의 순도와 풍자의 강도는 대개의 경우 비례했다.
이것은 비단 90년대의 강우석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공의 적>(2001)이 그의 ‘화려한 부활’로 일컬어지는 데는 강철중(설경구)이라는 ‘훌륭한’ 영화적 인물의 힘이 있었다. ‘법전 속의 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마음속 정의’를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던 강철중. 그가 쫓는 정의는 ‘사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리’ 속에 있었다. 그의 생리는 새로운 권력(정치 권력 ‘아래’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금융자본의 권력)에 본능적으로 저항하고, 그는 자신의 직감을 따라 그 권력을 향해 저돌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부딪쳐간다. 존속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펀드매니저 조규환(이성재)의 악마적 이미지는 무한증식을 생리로 하는 그 권력의 본성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쌍말과 육탄전으로 돌진해나가는 강철중이 웃음과 함께 묘한 긴장과 짜릿한 쾌감을 유발했던 비밀은, 바로 그 ‘생리’에 대한 영화적 포착 속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강우석은 ‘변화’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아마도 <실미도>(2003)의 성공 전후부터일 것이다. 그는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이라는 목표와 ‘코미디’라는 전략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웃음’보다는 ‘감동’에 무게를 두겠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로 기획된 <공공의 적2>는 전작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판’은 커졌고, 그에 비례에서 ‘쌍말’이 줄어드는 대신 ‘설교조 대사’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웃음’이 줄어드는 만큼 ‘감동’이 정확히 그만큼 줄어들었다.
영화 <한반도>는 <실미도> 이후 선회한 그의 연출 방향의 확대재생산이자 완결판이다. 규모는 최대한으로 키워졌고, 그만큼 설교조 대사는 늘어났다. 인물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국가’와 ‘민족’을 외친다. 그리고 관객에게 그 국민과 민족의 일원으로서 분개하고 감동하라고 훈계하고 설득한다. 하지만 그 외침은, 최근에 등장한 일련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마찬가지로,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블록버스터 <한반도>가 찾아낸 ‘국새’는 결코 ‘절대 반지’가 될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공공의 적>이 낳은 촌철살인의 대사(부패한 원로 정치인이 내뱉는 그 대사, “이 나라가 걱정이구만”)가 포착하고 드러낸 그 공허함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 모두의 이익이란 애초에 없다. 항상 그 누군가의 이익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