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월드컵으로 스트레스가 많으시죠?”라는 인사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고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인 것 같다. 며칠 전 진보적이고자 노력한다는 독자의 메일을 받았다. “월드컵 열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요? 미디어와 스포츠 상업주의의 얄팍한 속셈, 집단주의에 이용당한다는 생각에 속상하지만, 저 역시 그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분명 스위스-프랑스전까지 본 다음 새벽에야 잘 겁니다. … 안타까워하고 흥분하고 이 본능적 욕구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분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나는 글쓴이의 ‘소박함’에 혼자 오래 웃었다. 일상을 산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늘 ‘올바름’과 자기 욕망-쾌락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대개 승자는 후자다. 부정의와 허무주의가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은 하나의 기준만으로 해석될 수 없는 복잡한 직조이며, 개인은 투명한 주체가 아니라 상호 환원될 수 없는 각양각색의 권력의 교차로 속에 살아간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경기 자체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남들은 ‘배후’라고 하지만)은 흥미진진한 텍스트다. 축구는 세계와 개인과의 관계가 체현(體現)된 몸의 드라마다. 지단과 앙리를 보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와 자국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지 않았던 보부아르와 카뮈를 생각한다. 심지어 카뮈는 이유없이 알제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인생의 부조리’라고 했다! 그에겐 한낱 ‘부조리’지만, 알제리 사람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살인이다. 베컴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영국 백인의 귀속 지위를, 한국의 일본-호주전 시청률이 일본보다 높다는 사실에 여전한 우리의 열등감을 본다. 2002년 히딩크가 대표팀의 즐비한 ‘미남’들을 제치고 같이 휴가가고 싶은 사람 1위에 뽑혔을 때, 사랑은 대화하고 싶은 욕구라고 생각했다. 당시 황선홍 선수는 첫골을 넣자마자 (히딩크가 아닌) 박항서 코치에게 안겼다. 그는 전날 밤 긴장으로 잠들지 못하고 코치에게 전화했는데, 코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동안 넣은 골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그 꿈을 꾸렴.” 그는 아침에 다시 황 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네가 꾼 꿈이 오늘 실현될 거야.” 나는 박항서 코치가 애정, 지성, 보살핌으로 훈련된 뛰어난 심리상담가라고 생각했다.
“월드컵에(혹은 신자유주의에, 가부장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게 이 말은 마치 공기에 반대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억압적인 사회체제가 좋다거나 안주하자는 뜻이 아니다. 찬성/반대 중심의 사고는, 내가 대상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현실 초월적 관점을 전제한다. 지구 밖에서 지구의 무게를 재려고 했던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를 찾겠다는 관념론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군사주의는 대상이 없다. 즉, 내부와 외부가 없다. 우리는 이 궤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부역’하며 살아간다. 오염되지 않은 바깥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페미니스트도 몸무게로 고민하며, ‘안티 조선’도 <조선일보> 문화면을 읽고, 교육운동가도 학벌로 스트레스받고, 환경운동가도 자가용을 탄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더 비난받아야 하는가? 박지성의 골에 환호하면서 “월드컵이 민중생존권을 억압한다”는 글을 쓰는 친구에게 “너의 모순을 즐겨라”고 말했다. 모순을 즐기려면, 일상을 정치화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용기와 감수성, 긴장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피곤한’ 일이다. 이때 모순은 이중성이 아니라 창조성과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지배 세력이 월드컵을 3S식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월드컵 자체가 다양한 정치가 각축하는 장이다. 1999년 3월 나토의 유고 공습 당시, 프로축구 삼성-SK전에서 결승 헤딩골을 넣었던 유고 출신 선수 샤샤의 골 세리머니는 나를 울렸다. 골인 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유니폼을 들어올렸다. 그의 흰 셔츠에는 “Nato, Stop Assail”(나토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매직 글씨가 쓰여 있었다. 자신의 다급하고 절실한 주장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가슴 조이며 골을 넣으려고 애썼을까. 그의 골은 개인의 성취이자 정치적, 역사적 행위다. 축구 스타만 이런 실천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보다 훨씬 전인, 1970년 이미 화이어스톤이 <성의 변증법>에서 말했다. “가부장제 핵가족은 여성을 분리 통치한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집집마다 혁명가가 존재한다.” 월드컵의 전 지구화는 투쟁의 세계화이기도 하다. 반대보다 개입을, 이용당한다는 생각보다 협상을, 그리고 해석 투쟁에 참여하자. 현실 유지 세력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일상과 ‘정치’의 인위적인 경계에 도전하는 모순적인 다중이다(이 글은 여성주의자 이승주와의 대화에서 도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