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4년 전 심장마비 수준에 비하면 약과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2006년 독일월드컵 한국의 첫 게임이 이제 다섯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국가대표 트레이닝 셔츠와 4호 머플러를 두른 채 땀을 뻘뻘 흘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땀에 절은 손을 꼭 잡으며 “걱정 마”라고 속삭이던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하지만 어김없이 서전의 순간은 돌아왔고 설렘은 여전하다. 요즘은 기껏해야 1년 내내 리그 경기 네댓번, A매치 한 게임 정도를 경기장에서 볼 뿐이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는 과거의 열혈축구팬들보다는 월드컵의 이상 열기, 무차별적 상업주의, 냄비근성을 가진 팬들의 오버액션을 경계하라는 지인들이 많다. 포항의 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 아직도 툭하면 월차를 사용하는 한 친구는 일부러 월드컵을 안 보겠다고 할 지경이다. 사실 나도 이동국이 다치고, 김병지가 엔트리에서 빠졌을 때 너무 속이 상해서 이번 월드컵은 보지 말까하고 꽤 오래 고민했으니까.
하지만 한적한 호프에서 몇몇 친구들과 개막전을 지켜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아가버렸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필림 람의 측면 돌파, 피치의 마에스트로 후안 로만 리켈메가 지휘했던 중앙 전개의 향연, 대학에서 취미생활로 축구를 시작한 1969년생 노장 샤카 히즐롭의 눈부시고 눈물겨운 선방, 파벨 네드베드의 투혼과 토머스 로시츠키의 재능이 어우러진 완벽한 경기템포 조절을 목도하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 팀이 경기를 시작한다. 모 국제전화 광고에서 “아들아, 후배들아! 너의 모든 영혼을 쏟아내야 한다”고 외치던 차붐의 고장 프랑크푸르트에서 토고와 우리는 첫 승부를 벌인다. 우세하리라 짐작하지만 하일성 아저씨의 말처럼 “축구, 몰라요”가 이 시합에 대한 내 예상이다. K리그 레전드 김병지는 한 스포츠지와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팀은 예상치 못한 플레이를 많이 하고, 토고는 역습 패턴이 좋아서 수비전환을 빨리 해야 한다”고 말했다. 준비는 끝났고 우리 팀은 피치 위에 섰다. 세골씩 먹으며 모래성처럼 무너져간 이란과 일본을 대신해 우리 팀이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보여주길 바란다. 35살에 월드컵에 데뷔한 체크의 심장 파벨 네드베드는 “나에게 러닝은 일이 아니라 인생 자체다”라고 했다. 우리 팀이 국가의 명예보다는 그들의 인생에 후회가 남지 않을 플레이를 펼치기를 소망한다. 그대들이 가슴이 터지도록 달려나갈 때, 숨이 턱에 닿도록 응원하겠다. 그대들은 나의 챔피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