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버스 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2004년 여름, 남자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는 버스의 색상 이니셜을 놓고 농담이 오갔다고 한다. 초록색의 지선버스를 의미하는 G는 게이 전용버스, 푸른색의 간선버스를 의미하는 B는 바텀(남자 동성애자 중 여자 역할을 칭하는 은어) 전용버스라는 것이다. 빨간색의 광역버스 R과 노란색의 순환버스 Y는 설명조차 못하는 이 싱거운 농담은 모든 것이 이성애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꿈꾸는 작은 일탈을 의미한다. R과 Y를 설명하지 못하면 어떤가. 전체 버스의 절반만이라도 자신들의 세상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망. 서울시 버스 체계에 대한 퀴어적인 발상.
올해로 7회째 맞는 퀴어문화축제는 바로 이 ‘퀴어적인 발상’에서 시작한 행사다. 동성애자와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아니다.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표현도 인정해주는 문화. 그 다름과 차이의 문화가 아름답게 채색되는 공간, 그것이 퀴어들이 꿈꾸는 세상이다. 지난 5월30일 ‘수다회’를 시작으로 올해도 퀴어문화축제가 시작했다. 13일 동안이지만 ‘영화제’, ‘콘돔까페+’, ‘강연회’ 등 행사는 서울 곳곳을 무지개 빛깔로 수놓았다. 그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조심스레 혹은 왁자지껄 행사장을 찾았고, 마음 맞는 퀴어들과 벅차게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축제 폐막 하루 전인 6월10일, 종로 일대에서 퍼레이드가 열렸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부었지만, 700여명의 참가자들은 멋지게 대미를 장식했다.
취재차 그곳을 찾은 영화기자 J도 비에 바지를 적셔가며 종로 바닥을 걸었다. 빌리지 피플의 <Y.M.C.A>가 아스팔트를 울렸고, 반짝이 패션 언니들의 몸짓이 J의 마음도 울렸다. 하늘이 열리더니, 퀴어들의 세상이 열리더라. 취재를 한답시고 축제 행사장 곳곳을 돌아다녔던 지난 13일간의 기억이 J의 머리를 스쳤다. 바지는 젖었고, J의 두 다리는 어느새 음악에 스텝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 G라는 이니셜을 옆에 두른 지선버스 한대가 지나갔다. 그 싱거웠던 농담, 이상한 기억과 현실의 몽타주. 그러므로 이 글은 축제 13일간의 시간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영화기자 J의 퀴어세상 체험기 혹은 비에 젖어 퍼레이드 행렬과 뒹굴었던 영화기자 J의 매우 퀴어적인 취재기.
비가와도 눈이와도 퀴어
“붉은색 리본을 맨 사람들의 촬영은 금지됩니다.” “프레스 카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일반 시민이더라도 촬영을 하실 수 없습니다.” 6월10일, 퍼레이드가 열린 종묘공원에는 유독 카메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원봉사자들이 눈에 띄었다. 퍼레이드에는 참가하지만 사진촬영은 원하지 않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함이다. ‘사진 찍기를 거부하면서 퍼레이드엔 왜 나와’라는 불평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2001년 커밍아웃한 뒤 방송계에서 거의 사장되었던 홍석천씨의 일이 떠올랐다. 커밍아웃과 퍼레이드, 홍석천씨가 커밍아웃을 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퀴어 후진국’ 한국에서 이 두 단어는 아직도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커밍아웃은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는 물론 학교와 직장 내에서의 위치조차 위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10조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퀴어들은 모든 국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한번의 플래시백, 일주일 전 진행된 더글러스 샌더스 교수의 강연회에서도 현실과 법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토론이 오고갔다. 이미 자신도 커밍아웃을 한 샌더스 교수는 가끔은 격렬하게 또 가끔은 게이 특유의 땍땍거리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유엔기구의 인권조항에 대해 설명했다. 강연의 요지는, 아무리 멋진 국제법과 국내법도 실질적인 효력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 다소 난해한 강연이었지만,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번지르르한 단체 속에 가려진 한국의 인권 상황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우연한 기회에 커밍아웃을 강요당한 레즈비언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경우,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면서 자퇴를 강요당한 학생. 답답한 현실에 주먹이 불끈하던 순간, 빗소리를 헤치며 들려온 퀴어문화축제조직위 한채윤 기획단장의 목소리가 영화기자 J를 다시 종로 바닥으로 데려왔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날씨에만 퀴어인가요? 밤에만 퀴어고 낮에는 퀴어가 아닌가요?” 다소 철학적인(?) 질문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바지는 바지대로 젖고, 치마는 치마대로 젖고, 이왕 버린 몸 그냥 신나게 놀아보죠.” 한채윤 기획단장의 퍼레이드 개막 선언이 있자 곧이어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퍼레이드 행렬의 서두를 장식한 이들은 이반풍물패 ‘바람소리’. 퀴어 퍼레이드의 매우 한국적인 시작, 그 흥겨운 장단에 지나가던 노인들도 어깨를 들썩인다. 한바탕 징과 꽹과리가 놀고 가더니 뒤이어 첫 번째 행사 차량이 등장했다. 노래 <I’ll Survive>로 유명한 영화 <프리실라>를 컨셉으로 한 이 차량의 포인트는 신발 모양의 의자와 그 위에 앉아 있던 고운 자태의 여인. 한 송이 바이올렛을 연상시키는 보랏빛 드레스와 한손에 펼쳐든 부채가 압권이었다. 세찬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여인의 뒤를 오색 찬란한 의상의 여인들이 따랐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눈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차, 게이들의 수다가 들려왔다. “저 남자 멋지지 않냐?” “내 식성(호감가는 스타일)이야, 찜했다.” 다시 한번의 플래시백. 5일 전 만났던 게이들이 떠올랐다.
메트로섹슈얼에 대한 환상, 레즈에 대한 편견
총 두번의 수다회에 참여했다는 두명의 게이는 녹음기를 들고 앉아 있던 영화기자 J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메트로섹슈얼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홍석천이 아니라 원빈처럼 생긴 애가 커밍아웃했으면 (동성애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이미지가) 더 좋아지지 않았겠어? 메트로섹슈얼 이미지처럼. 게이는 모두 다 땍땍거리는 마짜(바텀을 의미하는 또 다른 은어)인 줄 알잖아.” “그렇다고 게이가 다 원빈같냐? 그것도 아니지. 땍땍거리는 애들도 많잖아.”
메트로섹슈얼,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심슨이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게이들의 이미지에 힘입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남성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사실 그 이전까지 ‘게이 혹은 호모 같은’이라는 말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성은 외모나 패션에 대한 관심과 욕구를 ‘여자 같은 행위’로 간주했고 이를 숨기려 했다. 화장품을 고르고, 직접 속옷을 선택하는 행위는 남성으로서 피해야 할 일종의 금기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트로섹슈얼’의 등장은 남성들에게 이와 같은 무게를 덜어줬다. 메트로섹슈얼은 ‘게이 같지만 게이가 아닌’이라는 수식어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즉 메트로섹슈얼의 등장은 남성들에게 ‘게이스러움’의 부담감을 덜어주면서 표현 욕구를 충동시켰다. 여자 같다는 비웃음 없이도 미용실과 피부관리실의 출입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게이 이미지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 패셔너블 가이와 게이의 만남? 이날 만난 두 게이의 고민은 이 물음표 안에 있었다. “메트로섹슈얼은 게이들의 선망이겠지. 그런 이미지도 사실 다 가짜잖아.” 그렇다, 메트로섹슈얼은 정확히 게이이기를 거부하는 순간에만 성립되는 묘한 환상이다. 피츠버그를 배경으로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다룬 외화 시리즈 <퀴어 애즈 포크>의 국내 팬 카페에는 일반 여성 회원들만 들끓고 있다. <왕의 남자> 이준기의 ‘석류’에는 환호하면서 진짜 게이 홍석천의 <뽀뽀뽀>는 거부하는 세상. 게이 이미지에 대한 매우 이상한(queer) 소비행태이다.
바람개비로 장식한 두 번째 차량이 등장했다. 축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바람개비는 희망의 상징이라 한다. 차를 이어 골판지 박스를 얼굴에 뒤집어쓴 레즈 언니들이 나타났다. “엄마, 나 레즈비언이거든.” “미녀는 레즈비언을 좋아해.” 당당하면서 코믹한 구호들이 쓴웃음을 짓게 했다. 여기서 생각난 한 레즈비언과의 대화. “그나마 게이들은 일반 여자들이 좋아하기라도 하지. 레즈들을 일반 남자들이 좋아하나요? 절대. 일반 남자들의 퀴어 혐오증은 정말 상상 이상이에요.” 일주일 전 만났던 한 레즈비언은 게이보다 더 협소한 레즈비언들의 입지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사람들이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다 남자 같은 여자를 떠올려요. 그 사람들은 레즈바(레즈비언을 상대로 하는 술집)에 오면 아마 다 놀랄걸요.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이번 축제의 레즈비언 수다회에 참석했다는 그녀는 레즈비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지적했다. 왠지 혼나고 있다는 느낌? 갑자기 손바닥에 흐르는 땀? J기자는 표정관리에 힘쓰며 레즈비언에 대해 다시 사고하자고 다짐했다.
’위풍당당, 퀴어행복’,
편견, 항상 문제는 이놈이었다. HIV 감염자에 대한 편견은 더 심하다. 2일 전 다녀온 콘돔까페+는 HIV 감염자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자리. HIV 감염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민과 경험담을 전수 받은 이들은 스스로를 HIV 복제감염자라 칭하고 카페의 손님을 맞았다. 질문의 범위를 망라하는 손님들의 궁금증에 맥주를 마시며 성실히 답하는 복제감염자들. ‘뽀뽀만 해도 에이즈에 걸리나요?’라는 질문부터 ‘HIV에 감염된 사람들도 섹스를 하나요’라는 질문까지, 그곳의 분위기는 행사장 입구에 놓인 막대 사탕 모양의 콘돔처럼 유쾌하고 진지했다. 한병씩 비워지는 맥주병과 조금씩 풀려가는 궁금증들. 퍼레이드 곳곳에 보이는 구호들이 좀더 진지하게 다가왔다. “감염자 인권없는 AIDS 개정법 반대”, “직장 내 신체검사에서 AIDS 항목 제거하라”. 무지갯빛 풍선으로 장식한 세 번째 차량이 종로2가를 지날 무렵, 맷돌춤의 그 음악이 흘러나왔다. ‘돈차, 돈차.’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르고 SM 복장을 한 두 아저씨는 허리를 돌려댔다. 가끔씩 ‘호모 새끼들, 데모하냐’는 잡음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퍼레이드는 업템포를 유지하며 행렬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순간 행렬의 꼬리가 낙원상가 앞을 지났다.
한번의 점프컷, 6월6일부터 낙원상가 빌딩 4층 필름포럼에서 시작된 영화제는 퍼레이드가 한창이던 그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흐린 날씨에 퍼레이드 참가를 포기한 레즈비언들, 학창 시절 100m 달리기 순서만 오면 어딘가로 숨어버렸던 운동신경 꽝의 게이들, 주말이 아니고서야 영화제를 찾을 수 없었던 일반 샐러리맨들, 그들을 위한 빛과 어둠의 축제가 극장에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동성 커플들의 사이좋은 데이트 현장도 포착되었고, 나홀로 솔로들의 반짝이는 게이다(gaydar)도 감지되었다. 일반 상영장에선 느낄 수 없는 이상한 긴장감, 비어 있는 옆자리를 계속 신경쓰게 되는 분위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문화체험이라면 이것은 분명 퀴어문화 체험. 며칠 전 관람한 <70년대 게이섹스문화>의 스틸 사진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 순간, 제리 할리웰 누님의 “하늘에서 남자들이 쏟아지고 있다”(It’s raining man)는 고성이 들려왔다.
행렬은 어느새 퍼레이드의 종착점인 씨티은행 주차장에 다가서고 있었지만 반짝이 누님들과 가죽 팬티 형님들의 흥은 가실 줄 몰랐다. 비를 맞아 오히려 더 섹시해 보이는 퍼레이드 참가자들, 옷과 가방, 머리마저 몽땅 비에 젖어 이미 제정신을 잃어버린 영화기자 J. 우산이 들려 있던 손은 어느새 허공을 헤치는 춤사위로 변해 있었고, 마음은 파티가 열린 이태원, 신촌, 종로의 클럽을 향하고 있었다. 게이와 레즈비언, 트렌스젠더와 이성애자.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된 듯한 흥겨움, 그 자리에 나온 모든 사람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솔직히 표현할 줄 아는 용기, 지연과 슬라이드 독의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 이날 퍼레이드는 발리우드의 어떤 영화보다도 더 흥겨웠다. “우리가 날씨 좋은 날에만 퀴어인가요? 밤에는 퀴어고 낮에는 퀴어가 아닌가요?” 여기서 다시 한번 한채윤 기획단장의 철학적인 질문. 퀴어문화축제의 엔딩은 없다. ‘위풍당당, 퀴어행복’이라는 이번 축제의 슬로건처럼 이날의 행복은 고스란히 이어지리라. 축제 분위기에 몰입한 영화기자 J도 외쳤다. 퀴어에 엔딩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글의 엔딩도 없다.
한국판 퀴어 시리즈, 주인공을 캐스팅해볼까?
온라인페스티벌 <퀴어 애즈 포크> <L워드> 가상 캐스팅 설문 결과
한국판 <퀴어 애즈 포크>와 <L워드>를 제작한다면 어떤 배우들이 캐스팅될까?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온라인페스티벌을 진행하며 위의 두 가지 설문을 실시했다. <퀴어 애즈 포크>는 남성 전용, <L워드>는 여성 전용으로 진행됐다. 퀴어들이 뽑은 한국판 퀴어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피츠버그 지역의 마성의 게이, 잘나가는 광고 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맨, 브라이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국 배우는 누굴까. ‘한큐에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필수적인 이 역할에 참가자들은 장동건을 꼽았다. 총 132명이 참여해 56명의 표를 얻은 장동건은 40표를 얻은 에릭을 살짝 앞섰다. 브라이언을 한큐에 꼬신 남자 저스틴 역에는 어떤 배우가 뽑혔을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순수하고 소년 같은 이미지에 약간의 반항기가 섞인’ 천정명과 원빈을 우선 순위로 꼽았다. 결과는 55표를 얻은 천정명의 두표차 승. 그렇다면 가장 끼스러운 캐릭터 에밋 역은 누구에게 가장 잘 어울릴까. 다소 의외의 결과이지만 강동원이 ‘스타일리시하고 끼스러운 백치미의 소유자’라는 평과 함께 에밋 역에 당첨됐다. 브라이언의 불알친구 마이클 역에는 신하균이, <퀴어 애즈 포크>의 유일한 레즈비언 커플 린지와 멜라니 역에는 김혜수와 엄정화가 각각 뽑혔다.
새까만 머리와 깡마른 몸, 우유부단한 성격의 제니는 뒤늦게 성 정체성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설문 참가자들은 이 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로 이나영을 꼽았다. 그녀의 경쟁상대는 정려원. 한 레즈비언 참가자는 이나영은 레즈비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배우 중 한명이라고. 7년간 동거를 해온 베티와 티나 커플에는 김혜수와 이영애가 꼽혔다. 성 정체성을 숨겨왔던 또 하나의 캐릭터 데이나, 테니스 선수인 이 역할은 장진영에게 돌아갔다. 쾌활한 성격의 바이섹슈얼 앨리스는 김선아에게, 원 나이트 스탠드를 즐기는 매력녀 쉐인은 한고은에게 돌아갔다. 한편 베티의 골칫거리 이복언니 키트 역은 배종옥이 고두심과 이혜영을 물리치고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