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달리자고 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달리자도 아니었고, 잘 달리자도 아니었다. 말 달리자였다. 노래방만 가면 성대가 찢어지도록 불러젖혔다.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놈이 될 수 없어. 말 달리자. 우리는 달려야 해. 거짓에 싸워야 해. 말 달리자. 서태지도 좋았다. 듀스도 근사했다. 하지만 크라잉 넛이나 노 브레인이라는 정신나간 이름을 가진 사내놈들의 펑크는 정말이지 티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었다. 정신적 사춘기를 뒤늦게야 경험하는 한국의 남자 아이들에게 들끓는 젊음의 송가는 그토록 신명이 났다. 아주 죽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크라잉 넛도 군대를 갔다. 가끔 군악대 옷을 입고 군인 앞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워 마음이 다 아팠다. 2년 동안 열심히 상명하복의 규칙을 따라 군바리로 살았을 테지. 새로 들어온 신참 갈구고, 고참들 군화도 닦아주고, 요즘 애들은 왜 이러나 씩씩거리기도 하면서 개구리로 살았을 테지. 하지만 그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윤도현에게 넘겨주고 군대로 들어가버린 것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민 응원 밴드 윤도현밴드야 그럴 만도 했지만, 국민 응원 밴드 크라잉 넛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다. 며칠 전 TV를 틀었더니 크라잉 넛이 목의 핏대가 살가죽을 뚫고 나올 듯 노래를 질러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손을 들어라. 발을 굴려라. 모두 노래부르자. 반만년 달려온 나의 조국과 우리 영웅을 위해! 10년 전과는 다른 아찔함이 느껴졌다. 싱글의 제목은 <히어로>. 독일월드컵과 박주영에게 헌정하는 응원가라고 했다. 젊은 펑크 밴드가 조국의 16강을 위해 시민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실직한 젊음의 울분을 토해내며 “런던은 권태로 불타고 있다”던 클래시, “신이시여 여왕과 그녀의 파시스트 정권을 구하소서. 영국이 꿈꾸는 미래 따위는 없소”라고 절규하던 섹스 피스톨스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위해 웸블리 구장의 버라이어티 쇼에 참가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건 (그런 게 있건 없건 간에) 펑크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스리 코드와 연주 못하기(anti-playing)가 아니라 뮤지션의 애티튜드(Attitude)가 진정한 펑크의 의미라면, 조국의 승리를 외치며 영웅을 노래하는 것은 더이상 펑크가 아니니까.
물론이다. 한번도 이 나라에서 섹스 피스톨스를 바란 적은 없다. 한국의 펑크는 노동계급 청년들의 하위문화로서가 아니라 대학생들의 하위문화로 시작된 문화운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괜스레 펜대를 굴리며 펑크의 의미를 낭만적으로 과대평과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 게 맞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권태와 울분을 일깨우며 함께 소리질러줄 수 있는 펑크록이 필요치 않은 것일까. 혹은, 한국의 펑크록은 젊은이들의 울분을 대변하기보다는 반만년 조국의 무궁한 월드컵 영광을 대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선택은 그들의 것이라 나는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사람은 늙고 세상도 늙는다. 10년 전의 넛들은 거짓과 싸워야 하니 다들 말 달리라 외쳤고, 지금의 넛들은 반만년 달려온 나의 조국과 영웅을 위해 손을 들라고 외친다. 말은 어쨌든 달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