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계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던지던 시절이 있었다. 대답에 따라 스무살을 갓 넘은 어린 청년들이 친구와 적으로 나뉘었고, 자기가 가진 세계관을 칼날처럼 갈아놓는 건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 시절, 게임에도 세계관이 있다는 얘길 들었으면 피식 웃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게임에서 세계관이란 말은 그때 얘기하던 세계관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게임 세계의 전체적인 상”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떤 게임 시스템의 베이스라고 이해해도 좋다. 게임마다 세계관은 전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정형화된 세계관이 있어서 많은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따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롤플레잉게임의 세계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어드밴스드 던전 앤 드래곤’(AD&D)이다(얼마 전 개봉되었던 <던전 드래곤>이란 영화는 이를 마음대로 조합한 것이다). 제목 그대로 음침한 던전이 나오고 드래곤이 불을 뿜는 중세 판타지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세계관을 기본으로 그 세계를 움직이는 좀더 구체적인 ‘룰’이 있다. ‘포가튼 렐름’이니 ‘드래곤 랜스’니 하는 것들은 이 룰이 구현되는 세계의 모습을 살아 숨쉬는 인물들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그려내는 작업이다. ‘포가튼 렐름’의 세계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발더스 게이트> 3부작이다. 1편과 1편의 확장팩, 2편과 2편의 확장팩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시로 플레이 시간만 200시간이 넘는다.
AD&D가 판타지 롤플레잉게임의 대표적 세계관이라면 ‘배틀 테크’는 우주를 배경으로 SF세계를 그리고 있다. 권력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심성은 30세기에도 여전하다. 우주 식민행성이 만들어지면서 ‘이너스피어’란 거대한 세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권력집단들의 투쟁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싸움에 회의를 느껴 떠나가지만 또다른 힘에 대한 욕망에 굴복해버린다.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권모술수 속에서 정의, 인류애 같은 것들이 가끔은 빛을 발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우주적 규모에서, 그리고 1천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뤄내는 이야기가 ‘배틀 테크’다. ‘배틀 테크’의 세계를 다룬 게임 중 제일 유명한 건 <맥 코맨더>와 <맥 워리어> 시리즈다. 1천년의 시간 중 불과 1∼2년으로 압축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게임의 무게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AD&D’와 ‘배틀 테크’처럼 널리 쓰이는 건 아니라도 개성있고 풍부한 세계관을 가진 게임을 만나는 건 참 즐겁다. 게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화려한 그래픽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건 물론이다. 불행히도 훌륭한 세계관을 가진 게임보다 너무 졸렬하고 유치해서 세계관이란 말을 갖다붙이기조차 민망해지는 게임이 더 많다. 그런 게임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없다.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게 할 정도의 강렬한 힘이 없다. 할 때는 지루하고, 하고 나면 잊혀진다.
나의 세계관이 무엇이냔 질문을 지금 받는다면 곧장 대답하진 못할 것 같다. 대답을 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던 시절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 ‘AD&D’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그 풍부함은 지금도 계속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세계관, 무조건적인 보호와 지지만 받던 칼날 같던 세계관은 앙상한 골격만 남은 채 길을 잃어버렸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