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한 택시운전사는 거기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 러시아에서 이주했다는 그는 LA에서 한번도 눈을 보지 못했다고, 그래서 간혹 눈이 그리워 스키를 타러 가는 게 몇 안 되는 낙이라 했다. <크래쉬>는 ‘LA에 눈이 왔던 어떤 날’의 이야기다. LA에 눈이 오는 건 뉴욕이나 서울에서 눈을 보는 것과 달리 어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수개월 전 DVD로 <크래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내리는 눈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스크린 전체를 가득 뒤덮은 눈을 보면서 감독이 그 눈을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을까,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은 애타게 그리운 따뜻한 정이 되어 몸을 감싸고 포근한 솜이 되어 더러운 마음과 죄를 살짝 덮어준다. <크래쉬>의 많은 장면에서 사람들은 유리와 강철로 만들어진 문과 집과 차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이 열릴 때마다 고통이 등장해 그들은 통증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부분,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도가니인 미국의 인종문제와 집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에겐 특수하다는 인상과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편이고, 폴 해기스의 각본이 휴머니즘에 과하게 경도되어 있기에 연출에 임해서는 그 심경이 조금만 눌려졌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게 사실이다. <크래쉬>는 원인과 이유는 지우고 해답만 찾는 영화 같다. 얼마 전 짐을 정리하다 러시아인 운전사가 준 명함을 우연히 찾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LA에 다시 가면 그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 가족과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간다는 그가 내게 베푼 친절은 LA의 삭막함 속에서 다른 이방인을 만나며 느낀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천성이었을까.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DVD는 극장판보다 2분30초 정도 더 긴 감독판을 수록했는데, 라이언 필리페가 로커룸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장면이 새로 추가된 것 외에는 미세한 변화만 준 것들이라 큰 차이를 느끼기는 힘들다. 감독과 돈 치들, 제작자가 진행하는 음성해설은 연기 앙상블에 대한 칭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첫 번째 디스크에 수록된 감독의 간략한 인사말에 이어 두 번째 디스크에는 제작 뒷이야기(28분), 이야기 구성에 관한 감독의 변(5분),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LA에 관한 조명(14분), 인종차별이란 이슈를 다룬 ‘말하지 못한 것’(12분), 음성해설이 지원되는 7개의 삭제·확장 장면(10분), 각본·스토리보드와 영화장면 비교(13분), 뮤직비디오 등의 부록이 제공되는데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지루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