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글을 쓰게 된 이 코너의 이름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다. 유토피아란 말을 처음 안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꿈꾸기를 좋아해서 유토피아란 말을 널리 애용했다. 그런데 디스토피아란 말을 들은 건 불과 얼마 전이다. 그 사이 아마도 유토피아인 줄 알고 다가갔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유토피아를 온몸으로 야유하는 조어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디스토피아란 말을 만든 사람은 혹시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테크노피아를 표방한 가전회사의 전기장판에 엉덩이를 덴 사람이거나 홈토피아 건설회사의 아파트에서 날마다 옆집 부부 싸움을 청취해야 하는 사람.
이 칼럼의 코너명이 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서로 반대 의미인 두 단어의 관계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했다. 첫째는 두 단어가 대등한 병렬관계로, 세상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단순히 질문하는 경우이다.(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둘째는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관계로, ‘유토피아라니 디스토피아야’라고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는 경우이다(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셋째는 유토피아가 조건절이 되고, 디스토피아가 서술문이 되는 관계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면 디스토피아를 맞게 된다’고 개인의 태도를 중시하는 경우이다(if 유토피아, then 디스토피아). 나는 이중에서 세 번째 관점이 마음에 든다. 세상이 디스토피아임을 폭로 혹은 고발하는 자체보다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이 뭘 할 것인지 생각하는 건 요즘 한국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태도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5·31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도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번 선거를 언론은 ‘집권당 최악의 참패’로 정리했고, 원인을 ‘민심 외면한 노 정권의 무능과 오만’으로 규정했다. 나는 이 해설 자체가 틀렸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왜 현 정부에 대한 실망이 한나라당의 싹쓸이로 귀결됐을까는 정말 궁금하다. 아마 <한겨레>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6월7일자 1면에 ‘표적 집단 심층좌담-나는 왜 열린우리당을 버렸나, 서울 30대, 40대 7명에게 듣는다’라는 유권자 좌담의 결과를 정리해 실었다. 이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의 싹쓸이는 ‘열린우리당이 싫어서’이다. 싫은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그중에서 ‘국정운영을 잘못해서’ 한나라당으로 지지당을 바꾼 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개혁에 실패했거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서 우리당을 버리고 한나라당을 지지한 사람은 이해가 안 간다. 그 이유라면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싫어서 의사선택을 한다는 건 애초에 기대가 컸기 때문일 것이고, 그만큼 실망감이 커서 복수심이 생겨난 때문일 것이다. 부모에 대해 무한 기대를 하는 어린애는 끊임없이 ‘삐친다’. 나는 한국사회가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에 과도한 기대와 그에 따른 필연적 실망감으로 인한 ‘부정의 행동’이 상존해왔던 게 아닌가 싶다. 거의 모든 정권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등에 칼을 맞으며 퇴장하지 않았는가. 노 정권에 유난히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는 것은 그나마 권위주의 하나만은 확실히 개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정치의 보호’가 사라진 공백기의 금단증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비판은 사실은 정치에 대한 지나친 의존의 결과이다. 그런 사람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정치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제도의 변화가 삶의 변화를 보장할 것이며 개인적 실천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전제한다. 나는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느냐보다 어떻게 대통령과 관계 맺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대통령은 하느님처럼 전능하지 않고 아버지처럼 자상하지 않다. 5년에 한번 투표하고 가만히 앉아서 개혁달라, 밥달라, 평화달라, 자유달라고 하면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똑같은 부정의 행동을 동어반복할 것이다.
디스토피아는 아무런 비용없이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사람이 맞게 되는 현실의 이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불행해지기 시작한 건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면서부터란 말도 있지 않는가. 자기 집을 제 손으로 마련하듯 자신의 사회적 공간을 자기 노력으로 가꾸려는 ‘정치적 개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