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좋아했던 후배는, 단편집 <임신 캘린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로 취향이란 명백한 것이다. 나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별로였다. 잘 쓴 소설인 것은 분명하지만,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는.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임신 캘린더>를 읽었다. 빨려들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빛이라면, <임신 캘린더>는 어둠이었다. 온다 리쿠의 말처럼 ‘자기가 쓸 또 하나의 소설’을 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과거의 한 장면과 직면했다. 가끔 그런 소설을 만나면, 한동안 멍해진다. 고등학교 때, 김성동의 소설을 읽고 그랬던 것처럼.
<임신 캘린더>는 일종의 악몽이다. 그 악몽은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불면의 밤을 지새다가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볼 때의 절망감 같은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일들. <기숙사>에서, 오래 된 사설 기숙사에 있던 사촌동생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두려움 끝에 천장으로 올라가지만, 거기에는 시체가 없다. 오히려 그녀가 발견한 것은, 꿀이 흐르는 벌집이다. 벌집? 황당한 반전이지만, 그 또한 현실이다. 거의 취재를 다니지 않고, 자료 수집도 않고 단편을 쓰는 것은 오가와 요코의 작법인 것 같다. 오가와 요코는 집안을 어슬렁거리면서 ‘어딘가에 보이는 듯하면서도 실은 보이지 않는 장소’를 찾는다. ‘나의 임신 체험 따위는 슈퍼마켓에서 사온 신선한 양파처럼 아무 얘깃거리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양파가 싱크대 밑 수납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양이 시체로 변화하는 과정에 소설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임신 캘린더>는 그런 고양이 시체들로 가득한 환각이자, 현실이다.
나는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난 수영을 못해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체육시간이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시련을 초등학교 시절에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선은 공포… 그리고 치욕… 나는 수영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노력했어요. 아무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랐죠. 그런 한결같은 노력도 내가 수영장에서 배운 것 중에 하나죠.’ 이 단편에도, 결말 같은 것은 없다. 세 단편은 모두, 그 몽롱한 현실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나올 뿐이다. ‘애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고서도 여전히 수화기를 들고 있는 손바닥으로 한밤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한나절의 이야기가.
생각해본다. 아마도 오가와 요코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임신 캘린더>의 어둠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치카와 다쿠지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포근함 역시 <온 세상이 비라면>의 막막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둠을 알기에 빛을 이해하고, 빛을 느끼기 때문에 어둠을 감싸안는다. 그게 이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도록, 한결같은 노력에 엄청난 에너지를 써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