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논란,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공천 헌금 의혹, 최연희·박계동 의원의 성추행 사건에도 아랑곳없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상종가를 쳤다. 야당 ‘승리’의 주원인인 집권당의 문제, 즉 “부패보다 무능이 더 싫다”는 일부 여론은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대중의 위태로운(그러나 어쩌면 절박한) 욕망을 보여준다. 민중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보다 자신이 동일시하고 싶은 ‘명품 정당’(한나라당의 표현)에 투표했다.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개인들간의 빈부 격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때, 결국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겠는가. 역대 정권 중,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공동 운명체라는 근대 국민국가 특유의 본질을 가장 잘 활용한 체제는 박정희 시대였다.
어떤 면에서 나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발전한 한국 여성운동의 최고 수혜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운동뿐 아니라 대개 사회운동의 열매는 투쟁한 당사자들보다는 권력과 근접한 사람들이 맛보게 마련이다. 여성 중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기득권과 가장 가까운 여성은 ‘(힘있는) 아버지의 딸’이다. 그러나 나는 연좌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후광과 상관없이 정치인으로서 그녀의 능력과 품성은 같은 당 남성 지도자들보다 탁월하다고 본다. 문제는 박근혜 대표의 ‘여성성’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反)여성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성추문이 잇따르고 있지만 당 대표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성추행당’이라는 등식이 선뜻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는 어느 시민의 분석이었다(<한겨레> 5월6일자). 성폭력 사건 논란에서 가해 남성의 아내, 어머니, 애인 등 여성들이 앞장서서 남성을 옹호하거나 가정폭력, 성폭력 재판에서 가해자가 여성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모두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박근혜 대표님, 감사합니다”라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 오세훈 후보의 실언에서 보듯이, ‘보호받아야 할 여성’이라는 성역할 고정 관념은 박 대표 얼굴 상처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현재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3%로 세계 77위이며, 2002년 구성된 광역의회에서 여성 비율은 8.2%, 기초의회는 2.2%에 불과했다. 그나마 국회와 광역의회가 10% 내외인 것은 비례대표 할당제 때문이었다. 여성 정치인은 극소수다. 소수의 ‘뛰어난’ 여성 몇몇이 구색 맞추기로 등용될 때, 이들은 여성을 대변하기보다 남성 문화의 방패막이가 되는 구조에 갇히기 쉽다. 이때 ‘여성의 정계 진출’은 실상, 남성의 입장에서 동원과 ‘간택’을 의미한다. 새판 짜기도 끼어들기도 아닌, 배치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여성성은 과잉 재현되거나 섬세함, 부드러움 같은 ‘진정한’ 여성다움을 더욱 요구받는, 본질주의 정치학이 재생산된다. 이런 방식의 ‘여성의 정치 세력화’는, 정치를 여성(주의)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 정치화되는 것이다.
이는 성별뿐 아니라 계급, 장애, 인종 등 사회적 약자의 대표가 자기 집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배 세력의 ‘픽업’에 의해서 ‘주류’에 진출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세계적인’ 사례가 바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일 것이다. 인종 차별이 극심한 남부 앨라배마 출신인 그녀는 자신이 ‘속한’ 흑인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극우 백인 남성이 대다수인 군수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별과 인종은 마치 부시 행정부의 소수자 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물리학에서 ‘임계질량’(臨界質量)은 핵분열 연쇄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질량을 뜻한다. 이를 사회과학에서 원용하면, 한 집단에서 약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 임계질량은 30%다. 선거는 대의제 원리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원래 모든 대표자는 인구 구성 비율대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여성 50%, 장애인 10%, 동성애자 10%로 하고, 그외는 국민의 절대 다수인 ‘비명문대 출신’과 노동자, 농민을 선출해야 한다. 그전까지는 할당제를 실시하고, 다양한 형태의 ‘통일전선’이 필요하다. 생물학적 여성은 아닐지라도, 사회·문화적으로 여성 의식을 가진 남성과 연대해야 한다. 바람직한 대화는 메신저가 누구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통에 참가하는 이들의 정체성과 관련없이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이번 선거에서 작동된 박근혜 대표를 둘러싼 성별 정치학은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메시지의 정치가 아니라 여성성을 이용한 메신저의 정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