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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로 배우를 엿보다 [1]
김혜리 2006-06-26
15초 필름을 지배하라

배우 8인을 중심으로 살펴본 CF 속 스타 이미지와 흡입력

CF와 배우의 관계에 대한 가장 파다한 소문은, CF가 배우의 사치스러운 부업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라는 질문에서 이 기사는 출발했다. CF는 물론 상업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고 예민하다. 광고 대행사 컴온21의 이원흥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하 CD)는 “욕망의 이유를 따질 줄은 모르지만 욕망의 유형에는 민감하다”는 말로 광고의 습성을 요약한다. 다르게 말하면 TV CF는 스타와 장르를 고도로 증류해서 사용하는 15초 길이의 필름이다. 광고의 창작자들은 스타가 지닌 대중성의 핵심을 보존하면서 매번 새로운 타점(打點)을 모색하는 전위다. 따라서 배우를 모델로 기용한 CF는 지금 그가 대중적 감수성의 어떤 부위를 건드리는지 계산한 결과를 반영하는 배우 이미지의 최종 심급이기도 하다. CF와 배우에 관한 또 다른 소문은 CF가 연기력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못 된다. 연극, 영화, TV 드라마 연기에 탁월한 배우라고 반드시 CF에서 설득력을 발휘한다는 법은 없다. 거꾸로 CF의 흡인력이 호흡 긴 연기의 성공을 100% 보증하지도 않는다. 엄밀히 말해 CF는 ‘다른’ 종류의 연기력을 요구한다. 15초 안에 감각과 주의를 사로잡는 유혹의 기술은 희귀한 천분이며 재능이다. 적어도 광고의 촉수가 특별한 매혹을 감지한 모델이라면, 배우로서 훌륭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CF로 스타덤에 오른 다음, 배우로서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적지 않은 배우들이 그 증거다.

한편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한 광고의 진화는 CF 연기에도 새로운 차원을 더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BMW 단편영화 시리즈, 삼성의 애니모션 등이 보여준 브랜드 엔터테인먼트 광고. 리모컨의 기능 강화, 채널 다양화, 디지털 개인 매체의 발달 등으로 소비자들의 광고 회피가 수월해지면서, 완결된 엔터테인먼트로서 충분한 재미를 주는 텍스트 안에 제품 이미지를 심는 전략이 대두된 것이다. 자유로운 러닝타임과 표현수위, 타깃을 세분화한 제작이 가능한 브랜드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지금까지 순발력과 표현력에 집중돼온 CF 연기의 반경도 넓어질 수 있다. 휘닉스 커뮤니케이션즈의 김종진 콘텐츠 본부 수석국장은 “브랜드를 전달하는 중심점, 캐릭터로서 배우의 역할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CF라는 창을 통해 배우의 프로필을 엿보기 위해 광고의 창작자들을 만났다. 이어지는 8인의 배우에 관한 노트는 누구보다 눈 밝은, 배우의 관찰자들인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엮어졌다. 이어진 마정미 교수의 글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배우의 이미지와 CF의 아이디어가 부딪쳐 절묘한 불꽃을 피워올린 기억들을 돌아볼 것이다.

설정 안 해도 친근한 남자, 차승원

지난해부터 CF모델로서 차승원은 놀라운 구심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그의 모든 CF는 ‘차승원’이라는 캐릭터로 꿰어진 연작 에피소드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따옴표친 ‘차승원’은 007이나 미스터 빈처럼 아주 특정한 퍼스낼리티를 유지하면서, 라면을 먹고 에어컨 앞에서 랩을 쏟아내고 주유소로 항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기골 장대한 서구적인 미남이지만 CF 속 차승원은 내숭없고 전형적인 (유럽 여행 중에 고추장을 목놓아 부르는) 보통 한국 남자다. 어딘가 헐렁하고 아이처럼 금방 들통날 허세도 부리고 현실적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든 (편법을 써서라도) 해결할 듯한 사내. 차승원의 영화 속 캐릭터 가운데 CF 이미지와 가장 닮은 인물은 <선생 김봉두>의 ‘김봉두’다. 축구부 학생들에게 컵라면을 나눠주는 오뚜기 진컵 광고는 ‘김봉두’의 직접 인용이다.

CF 모델로서 차승원의 필살기는 친화력이다. 그가 광고하는 상품도 자주 구입하는 친근한 소비재에 집중돼 있다. 오뚜기 광고 대행사 애드리치의 은명희 CD와 최의경 차장은 “상대 모델이 없어도 독신남인지, 아빠인지, 인물의 상황을 자동적으로 형성하고 시청자에게 즉각 이해시킨다. 예컨대 진컵 광고에서는 ‘선생님이 말이야’라는 대사가 없어도 축구코치라는 설정이 바로 전달된다”라고 차승원의 장점을 말한다. 보해 복분자주 광고 대행사 웰콤의 유제상 CD는 친근함에 덧붙여 차승원이 지닌 은근한 신뢰감을 지적한다. 연기로는 웃음을 주지만 배우로서 프로페셔널하다는 이미지가 “예부터 내려오는 효능을 재미있게 풀되 기본적 신뢰를 줘야 하는” 광고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브랜드를 값싸지 않게 표현하되 엄숙하지 않고 편안하게”라는 최근 브랜드 마케팅 경향은 모델 차승원의 속성과 잘 부합한다고 유 CD는 말한다. 한편 청정원 순창 고추장 CF를 만든 상암커뮤니케이션즈의 이경동 PD는 차승원의 효과 빠른 연기에 주목한다. “‘매운맛이 사무칠 때’ 캠페인에서는 ‘매운맛’도 중요하지만 ‘사무침’이 더 중요했는데 차승원의 폭발적 표현력이 크게 기여했다.” 차승원은 적극적으로 콘티를 연구하고 애드리브를 보태는 모델로 광고계에 알려져 있다.

진라면 CF 제작진은 차승원을 ‘씨즐감’(먹음직스럽게 먹는 느낌)도 강하지만, 한마디 한마디를 쏙쏙 귀에 집어넣는 ‘세일즈 토크’(구매를 설득하는 말의 힘)가 강력한 모델로 분류했다. 차승원의 설득은 잘나고 권위있는 사람의 보증과는 성격이 다르다. 무엇을 써보니 좋더라, 맛있더라고 옆집 남자가 감각으로 감탄할 때 느끼는 솔깃함, 그것이 차승원의 설득이 낳는 효과다.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절대 순수, 이나영

영화와 드라마 속 이나영은 난해한 배우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불연속선을 그리는 인상, 늘씬하지만 나긋나긋하지만은 않은 움직임은 그녀의 미모에 알쏭달쏭한 너울을 씌운다. 그러고보면 이나영은 정착된 헤어스타일조차 갖고 있지 않다. 미소를 지을 때와 표정을 지웠을 때, 이나영의 얼굴은 판이하다. 물론 CF는 이나영의 미소를 편애한다. 장기 출연한 라네즈 광고와 나뚜루 아이스크림 CF에서 이나영은 달콤한 순수의 절대적 전형이다. 이 연상은 매우 강력해서 이나영의 아이스크림과 커피 광고는 5월29일 현재 광고포털 WWW.TVCF.CO.KR에서 제품과 모델이 어울리는 광고 1, 2, 5위를 차지하고 있다. 라네즈 광고를 집행한 태평양의 허재영 마케팅 MC팀장은 이나영의 이미지 영향으로 브랜드 연령층이 어려진 경향도 있다고 말한다. 천연 재료를 찾아 세계를 여행하는 컨셉의 나뚜루 아이스크림 광고 역시 이나영이 지닌 순수 이미지의 변주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어린애처럼 혀로 핥는 모습이 민망하지 않은 모델이다. 이 광고를 제작해온 대홍기획의 류홍준 CD는, 인공성이 옅은 이미지일수록 이나영에게 잘 어울린다고 평한다. 그리고 이나영은 지금 “‘깨끗함’의 이미지를 보존하면서도 그 요소 중 ‘깜찍함’은 덜어내는 과정에 있는 듯하다”고 관찰한다.

이나영이 구현하는 순수의 이면은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초현실성이다. 그녀에겐 외계에서 온 존재 혹은 사이보그를 연상시키는 이질감이 있다. 자기 취향이 분명한 젊은 층에 호소하는 맞춤형 설계를 부각시킨 벽산 블루밍 아파트 광고는, 이나영의 그런 개성을 로봇처럼 기계화된 동작으로 반영한 예다. 이 광고를 만든 제작사 브랙퍼스트의 수요일 감독은 이나영 본인이 예쁘게 나온 컷보다 개성있게 나온 컷을 선호한다고 전하며 “이나영은 아주 독특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영화나 CF나 아직 그녀의 모든 면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빅 모델 광고는 모델을 부각시키는 클로즈업 숏의 빈도가 워낙 높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나영의 CF는 유난히 클로즈업 숏이 압도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에 대해 류홍준 CD는 “이나영의 클로즈업이 보는 이에게 일으키는 파장이 커서 그런 인상을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표정의 미세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로 감흥을 자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인데, 이는 CF 연기의 중대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나영이 전지현, 문근영과 더불어 탁월한 CF모델로서 공유하는 속성은, “주어진 콘티를 창조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재능”이라고 수요일 감독은 지적한다.

순정만화의 신비한 미소년, 강동원

강동원은 감성 마케팅의 대표주자다. 그가 출연한 CF들은 주로 대사보다 음악으로, 목소리보다 몸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 CF는 잠시 정보 전달의 기능을 접어두고 특정 분위기를 형성해낸다. 세련되거나 신비스러운, 혹은 순정만화적인 이미지가 그것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샤프전자의 리얼딕 전자사전 CF, 전자상품으로는 드물게 감성 마케팅을 도입한 이 광고는 강동원의 긴 팔과 다리를 클로즈업하며 한 남자의 실연담을 담아낸다. 마지막 카피 한 구절을 제외하면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 이 CF는 매우 순정만화적이다. 모델 선정에 참여했던 샤프전자의 김국현 과장은 “전자사전의 주이용자들인 10대에서 20대 초반 타깃에 맞는 남성 모델 가운데 강동원이 주는 느낌이 가장 진한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힌다.

패션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강동원은 기존의 남성과는 달리 가늘고 긴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꽃미남이 한창 이슈로 떠올랐던 2000년대 초반의 남자 연예인들과 비교해도 이는 눈에 띄는 점이다. 아름다운 외모로 상실한 남성성을 근육이나 강렬한 눈빛 등으로 보상하려 하는 다른 남자 배우에 비해 강동원에게선 남성성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늘고 긴 눈과 얇은 입술을 지닌 그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인 입체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그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는 강동원이라는 이미지 하나만이 존재한다. 눈, 코, 입을 따로 떼어서 상상한다거나, 쳐다보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CF 속에서 표현되는 그의 이미지는 주로 신비스러움에 근접해 있다. “나서지 않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보통의 모델들과는 달리 신비스러운 느낌이 난다.” 팬택&큐리텔의 ‘나는 당신의 큐리텔입니다’편 제작을 담당했던 대보기획의 이원풍 AE는 강동원의 감성 마케팅이 기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친근하지 않은 감성으로, 불친절한 접근법으로 고객에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마치 백화점 윈도의 디스플레이처럼 그의 CF는 하나의 분위기,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강동원이 출연했던 다른 CF들도 마찬가지다. 2003년 제작된 CJ의 가쓰오 우동 CF는 추운 겨울날 일본의 어느 산간지역을 지나가는 열차 속 에피소드를 담았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이 CF에서 강동원은 현실이 아닌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KTF의 ‘소리바다가 내 것이 된다’편도 그렇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공간에 서서 음악을 듣는 그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매우 자연스럽게 체화해낸다.

강동원은 CF에서 하나의 독특한 하위장르로 기능한다. 이원풍 AE는 “CF가 상품의 세일즈를 목표로 하지만, 강동원의 이미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일즈를 가능하게 한다.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이지만 그의 이미지에는 세일즈에 대한 믿음도 있다”고 전한다. 이는 소비자가 특정 집단에 속하고 싶어하는 욕구에 기반한다. 강동원이 제시하는 세계는 비현실적이고, 불친절하기도 하지만 소비자들은 ‘강동원 월드’에 입장하고 싶어한다. 말을 하지 않고도 상품을 판매하고, 만화적인 공간에서도 현실적인 소비를 촉구하는 힘, 이것이 강동원 월드의 미혹이다.

정착할 줄 모르는 젊음의 육신, 전지현

CF 속 전지현은 정착할 줄 모르는 젊음의 육신이다. 광고에 등장한 그녀의 팔다리는 거의 언제나 리듬의 지배를 받고 긴 머리카락은 선율과 더불어 나부낀다. 전지현은 부단히 춤추고 달리고 웃고 울고, 세상을 여행한다(전지현의 아파트 광고가 선뜻 상상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처음 전지현을 주목받게 한 프린터 광고부터 최근의 슬림형 휴대전화 광고까지 그녀를 기용한 수많은 CF는 뮤직비디오적 양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게 완성된 그녀의 이미지는 ‘퍼나르기’를 통해 다시 통신망을 분주히 여행한다. 올림푸스 카메라, 라네즈 걸 광고에서 전지현과 작업한 이성호 감독(제작사 장화 신은 고양이)은 전지현의 CF는 대개 컷 수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고주가 가능하면 더 많은, 더 다채로운 전지현의 이미지를 15초 안에 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지현은 카멜레온이다. 매 순간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광고주도 되도록 많은 모습이 CF에 담기길 바란다. 그래서 의상도 여러 벌 갈아입고 로케이션도 여러 곳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태평양의 허재영 마케팅 MC팀장은 전지현이 “20대 중·후반 여성이 가장 동경하는 대상”의 자리를 확고히 점유하고 있다고 본다. 25살 여성의 아이콘, 세대 리더라는 입지는 모델로서 특권적이다. 라네즈 핫핑크 립스틱 광고가 색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허재영 팀장은 “어떤 핑크인지는 중요치 않다. 핑크의 판타지를 파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지현은 (어떤 핑크색인지 몰라도 좋은) 그 판타지를 피워올리는 심지다. 한편 스타성 안에서 매번 일말의 새로움을 끌어내야 하는 CF감독에게 전지현의 확고한 지위는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기도 한다. 흑백 화면과 사운드의 침묵을 시도한 라네즈의 “스킨의 힘을 믿으세요”편, “핫핑크로 말하세요”편은 모델의 아름다움과 제품 효능을 한껏 전시해야 하는 화장품 광고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시도로 꼽힌다. 김상태 감독(제작사 우라늄)은 “전지현에 관한 정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에 처한 전지현이라는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심리적으로 새로움을 끌어내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 광고 연작에서 전지현은 우울하고 권태로운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목소리가 묵음 처리되기도 한다. 같은 감독이 연출한 몸에 좋은 17차 음료 광고에서 전지현은, 자신이 마시는 것 하나에도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털어놓는다. “전지현이 날씬하다는 주지의 사실을 거듭 과시하는 광고는 시큰둥한 반응을 낳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동경의 목표로서 몸의 이미지를 보여주기보다 실제로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테스티모니얼’ 기법을 썼다”는 것이 감독의 연출 의도다. CF는 전지현이라는 아이콘의 강고한 환상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그 환상까지 인도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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