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밤마을 어언 10년. 외로운 주말 밤이면 밤마다 노구를 이끌고 황혼에서 새벽까지 밤마을을 다녔다. 친구들은 주말마다 출근도장을 찍는 나를 측은히 여겨서 “체력도 좋다”고 ‘야렸’지만, “체력으로 노냐, 정신력으로 버티지”라고 한번 더 ‘야리’면서 노련한 밤구두는 이태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얼마 전 밤마을 10년 만에 2번째 부킹을 받았다. 단골 ‘딴스홀’에서 웬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저…” 했다. 쭈뼛대는 태도로 미루어 목적이 분명했다. “저… 제 친구가 아저씨 좋아하는데요… 괜찮다고 그래서….” 허걱,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귀에 “아저씨∼ 아저씨∼”라는 말만 울렸다. 부킹을 받은 영광은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았다. 아니, 아저씨, 아저씨라니! 젊은이가 무심코 던진 돌에 아저씨는 가슴에 멍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괜히 친구따라 강남 갔다 아니 홍대 갔다 봉변을 당했다. 물좋은 10대, 20대 언니오빠들 사이를 헤쳐 요즘 잘나간다는 클럽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입장료를 내려는 순간, 문지기 오빠가 “저 나이가 좀….” 아니, 말로만 듣던 ‘뺀찌’였다. 뭐라고 한마디 했다가는 구차해졌다가 비참해질 것이 뻔한 ‘시추에이션’이었다. 너무 ‘쪽팔려서’ 황급히 문 앞을 나와 담배를 물었다. 자유 대한에 내가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니, 뼈저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음에는 모자 쓰고 와야지.
나이 들면서 다르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지하철에서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나 빌딩을 지키는 할아버지를 보면, 남다른 감상에 빠진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일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곰곰이 바라본다. ‘단일민족’ 한국에서는 사람을 구분지을 근거가 그래도 희박하다. ‘글로벌 스탠더드’인 계급, 장애에 따른 차별은 물론 여기에도 존재한다. 그 다음 여성을 차별하고 나면, 차별의 잣대가 별로 남지 않는다. 나이밖에는. 그래서 한국의 허드렛일은 나이 든 사람들이 도맡는다. 미국의 빌딩은 히스패닉이 닦지만, 한국의 빌딩은 노인들이 청소한다. 다시 노는 이야기로 돌아가면, 두어해 전 30대 후반의 미국 동포가 한국 클럽의 만장하신 20대 여러분을 보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미국 클럽에서는 인종 때문에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는 나이 때문에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어른이 되는데 나는 아직도 철부지야, 솔직히 이런 자괴담도 든다. 30대 초반까지는 친구들 모두가 결혼하지 않았다. 불과 서너해가 지나면서, 친구는 결혼하고 후배도 결혼했다. 나이주의 그래프에 따라서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아이도 보살펴야 하고, 장모님도 챙겨야 하고, 경조사도 챙겨야 한다. 30대 중반의 미혼인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이다. 솔직히 처음엔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죄책감은 아니지만 박탈감을 느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끊임없이 무언가와 부대끼는 저들에게 뒤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나이로 촘촘히 짜여져 있어서, 나이의 주기에서 이탈하면 무언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끝없이 자문하게 된다. 말도 못하는 아이와 ‘통화’하는 후배의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무언가에 정성을 기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쓸쓸해한다. 나는 30대 초반까지 나이주의의 잠재적 소수자였지만, 30대 중반에 비로소 현실적 소수자가 됐다.
타이를 서양 노인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타이는 따뜻한 햇살 같은 따뜻한 웃음으로 노인들을 맞이한다. 일년 내내 따뜻한 햇살에 저렴한 물가까지 겸비했으니 서양 연금생활자들 특히 독신 노인들에겐 천국이다. 더구나 그들은 서양에서 지나간 청춘이지만, 동양에선 아직도 청춘이다. 방콕에서, 파타야에서 60대 서양 할아버지와 20대 타이 아가씨, 60대 서양 할아버지와 20대 동양 청년이 다정하게 손잡고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나이와 자본이 어떻게 교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풍경이다. 아직은 노부부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이주이긴 하지만, 최근엔 동남아로 이주하는 한국 노년들도 생겼다고 한다. 나의 무덤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