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수십살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오만과 편견>을 내놓고 읽기는 겸연쩍었다. 그리고 ‘수다쟁이 노처녀’의 작품이라고 결론지었다. 얼마 전 극장에서 <오만과 편견>(2005)를 신나게 웃으며 본 뒤, 새로 번역된 <오만과 편견>을 단숨에 읽었고, 다시 10년 전에 에서 만든 미니시리즈 <오만과 편견>을 박수까지 쳐대며 보았다. 결론은? 역시 ‘수다쟁이 노처녀’의 작품이다. 그러나 의미는 달라져, 수다쟁이라는 건 말하는 재주가 좋아 그 이야기가 즐겁다는 것으로, 노처녀(제인 오스틴이 <첫사랑>을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한 건 서른을 훌쩍 넘긴 뒤였다)라고 함은 세상을 제대로 알 만큼 살았다는 걸로 바뀌게 됐다. 아무리 유쾌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물경 500페이지를 넘기는 게 고역인 사람에겐 뭐가 좋을까? 원작의 역동성을 느끼기엔 영화도 좋긴 하지만, 단시간에 뛰기가 숨찬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미니시리즈가 낫겠다. 제시와 전개 그리고 절정에 이르며 거대한 소나타를 듣는 듯한 원작의 구조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원작에 충실해서 여유있게 장편을 읽는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무도회 장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춤이란 추지 못해도 읽는 맛보다 보는 맛이 한결 좋으며, 무엇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역을 맡은 두 배우가 주고받는 눈길은 영상이 아니고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콜린 퍼스에 빠진 수많은 여자의 찬사를 들어온 바지만 나는 제니퍼 일리의 미소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리고 멜빈 탕의 피아노를 따라 흥얼거리다보면 심지어 푼수 엄마조차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다(셋째 딸 메리의 우울함은 여전하지만). <오만과 편견>을 다시 보고 읽으며 이 이야기는 현대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살이 다 된 <오만과 편견>에서 다루는 사랑과 다툼, 결혼의 과정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전통과 새로운 질서의 충돌은 지금 시대에 놓아도 하나 다를 게 없다. 현대판이라 할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비교하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간혹 ‘신데렐라 플롯’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이야기가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노력과 우연의 연속과 오스틴의 통찰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걸작이다. 10년 전 텔레비전물이어서 그런지 DVD 화질은 좋지 못하며, 부록으론 영화의 제작과정(27분)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