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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역동성을 지닌 도시공간, 서울의 마천루 돌아보기

“모더니즘의 재해석을 통해 건축사의 오랜 인본주의적 전통에 신선한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이 화려한 수사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가장 표준적으로 사용된다. 골치 아픈 개념어들이 출몰하는 이 복잡한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줄인다면 ‘현대건축을 발명했다’라고 갈무리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누구보다 현대 도시와 건축에 예리한 안목을 가졌다는 그의 대표적인(건축, 북디자인 양쪽에서 ‘혁신적인’이라 평가할 만한) 저서는 ‘S, M, L, XL’이라는 이상한 제목을 달고 있다. 옷 사이즈를 의미하는 이니셜을 나열하여 타이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엉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변화하는 것에는 단순히 면적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그의 노력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마천루를 렘 쿨하스의 표현으로 분류하자면 라지(Large) 사이즈 혹은 엑스라지(XLarge) 사이즈의 서랍에 속하게 된다. 마천루라는 거대한 사이즈의 건물이 도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건축의 개척자 렘 콜하스 사상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듯이 마천루는 도시의 지평선에 들쭉날쭉한 스카이라인을 멋지게 그려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시인의 삶의 방식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는 이야기로 풀어쓸 수 있다. 서구의 스타 건축가들이 아시아, 그중에서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각종 대형 프로젝트들에 관여하려 애쓰는 이유는 서울이야말로 그들이 상상하고 공상했던 ‘현대’의 모습이 가장 역동적으로 표출되는 현재진행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은 어느 도시보다 활발하게 타오르는 마천루의 활화산 지대와 같다. 강산이 변하는 속도에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서고 있는 마천루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급격한 도시 공간의 변화를 주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디자인할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한국 건축 거장시대의 마천루

1969년 고도성장 서울의 자랑_김중업의 삼일빌딩

삼일빌딩

청계광장으로부터 청계천을 따라 광교를 지날 쯤, 왼편에 보이는 짙은 색의 묵직한 건물이 한국 건축의 마지막 거장시대에 한축을 차지했던 김중업의 작품이다. ‘삼일빌딩’ 혹은 ‘삼일로빌딩’이라고 불리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층수가 31이며 동시에 3·1절을 상징하여 서울의 고도성장을 세계에 자랑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외교사절들이 남산1호터널을 거쳐 때마침 건설된 청계고가를 오르면 바로 정면에서 맞이하는 건물이 삼일빌딩이었으니 당시 정부로서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삼을 만했을 것이다. 게다가 건축주는 3공화국 시절 방위업체로 크게 성장한 ‘삼미’였다. 이는 삼일빌딩과 정치권과의 모종의 연관관계를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삼일빌딩이 세워진 건 1969년의 일이다. 당시 한국의 건축기술은 걸음마 단계였기에 혹여 무너질까 걱정되어 외국에 맡기자는 목소리가 컸었다. 하지만 빌딩의 완성은 고작 10층짜리 건물이 최고층의 자리를 차지하던 서울로서는 놀랄 만한 사건으로 등재되었고, 종로통에 서서 층수를 세어보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종로타워가 세워진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일빌딩의 층수를 세어보는 것은 일종의 서울 구경 패키지 코스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 비록 뉴욕의 ‘시그램빌딩’(Seagram Building)을 의도적으로 모방했다는 이유로 독창성에 훼손을 입은 게 사실이지만, 한국의 독자적인 기술로 초고층건물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원본에 버금가는 세련된 디자인은 30여년이 지난 요즘의 화려한 건물들 틈바구니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자연과 도시 풍경의 조화_김수근의 게이트웨이빌딩

게이트웨이빌딩

‘삼일빌딩’에서 남대문 밖으로 나와 서울역에 이르면 거대한 병풍처럼 좌중을 압도하는 ‘대우빌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에 비한다면 병풍 한쪽으로 새침 떼며 서 있는 24층짜리 흰색 빌딩은 쑥스러운 소년의 모습이다. 이 건물이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의 거장시대를 이끌었던 김수근의 작품이다.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면서 현재는 ‘게이트웨이빌딩’으로 불리지만 당시 이름은 ‘벽산125’였다. 125는 건물의 주소인 동자동 12-5번지에서 빌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건물 이름에 번지수를 기호처럼 넣는 것은 한동안 유행하던 현상이었다. 건축가 김수근은 현대 서울의 도시 풍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작업인 ‘벽산125’에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마천루라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를 다루면서, 김수근은 배경에 놓인 남산의 자연환경을 존중하기 위해 획일화된 직육면체 고층빌딩에서 벗어나 둥근 모서리를 파도치듯이 잘게 나누어 건물의 형상을 완성했다. 덕분에 ‘벽산125’는 남산을 배경으로 경직되지 않은 푸근한 인상을 풍겨내며 도시 풍경 속에서 담담한 조화를 이룬다. 보통의 마천루와 지상이 만나는 저층부는 평평한 땅 위에 거대한 상자가 앉은 것처럼 건조한 결과가 되기 십상인데 인간적인 척도를 섬세하게 반영하는 건축가 김수근은 여느 오피스 빌딩에서 보기 힘든 풍부한 공간감을 지닌 저층부를 디자인했다. 한국적인 공간에 천착하던 작가의 감수성과 현대 기술문명을 상징하는 마천루라는 서구적인 주제의 흥미로운 만남이 빚어낸 이채로운 결과였다. 남산을 가로막아 거대한 몸집으로 서울역 공간을 압도하는 대우빌딩의 위압적인 모습과 비교한다면, 건축가의 손길이 좋은 건물과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극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거대 자본 도시 서울의 현재 마천루

점점 거대화되는 서울은 예외없이 고도로 자본화된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이제 서울의 노른자위 땅에 김중업, 김수근이라는 거장 건축가의 ‘작품’이 세워지던 시절은 차라리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만한 순수의 시대로 느껴진다. 이제 서울은 세계 제일의 자본시장이자 부동산 시장이라는 남부럽지 않은 지위로 격상했고, 건축설계 시장은 서구 거대 기업형 설계사무실의 격전지가 된 지 오래다. 더군다나 최첨단의 기술과 디자인뿐 아니라 부동산 마케팅의 측면까지 포섭해야 하는 마천루의 경우 다른 유형의 건물들에 비해 그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미국 SOM과 KPF의 땅따먹기_테헤란로의 마천루

동부금융센터

늘씬하고 유려한 자태로 테헤란로 일대에 일렬로 늘어선 최첨단 마천루들의 크레딧을 살펴보자. 세계 최대의 설계회사로 꼽히는 미국의 ‘SOM’과 ‘KPF’가 흰 돌과 검은 돌이 되어 바둑판에 땅따먹기 하듯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다. 규모의 경제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리 놀랄 만한 결과도 아니다. 그 면면을 늘어놓자면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의 ‘쿨’한 마천루 리스트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먼저 ‘SOM’이 개입된 프로젝트를 보자면 비록 국제통화기금(IMF)으로 좌절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계획이었던 111층짜리 ‘삼성도곡빌딩’, 현재 한국 최고층 빌딩으로 등재돼 있는 73층의 ‘타워팰리스3’, 짧은 역사가 무색하게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써내려가고 있는 45층의 ‘스타타워’(바닥면적으로는 국내 최대의 건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팻 메시니 밴드의 공연처럼 훌륭한 공연에 관심이 있었다면 한번쯤 들렀을 법한 LG아트센터의 ‘GS강남타워’(38층) 등이 있다. 여기에 ‘KPF’의 프로젝트를 합치면 서울 마천루 투어 가이드북이 완성된다. 강남역 모퉁이에 한창 공사 중인 삼성의 야심찬 프로젝트 ‘삼성강남타운’(43층, 34층, 32층 세개동), 테헤란로 일대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조형을 자랑하는 ‘동부금융센터’(35층) 그리고 저층부의 과감한 디자인이 인상적인 28층짜리 ‘포스틸타워’까지 화려한 면면을 자랑한다. ‘KPF’의 목록은 현재진행형으로 가열차게 목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예전과 달리 국내 대형 설계조직의 수준도 급성장하여 공룡들의 틈바구니에서 좋은 결과물을 내놓고는 있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른 설계시장 개방이라는 악재를 고려해볼 때, 주요 랜드마크가 될 만한 대기업의 대형 프로젝트는 외국 설계사의 디자인에 한국 설계사의 후반작업이라는 현재의 구도가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마천루가 지닌 공간적 폭발력이 서울의 도시구조에 끼칠 지대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설계시장의 문제를 문화주권이 담보된 게임에 결부시키는 것이 그리 과민한 반응은 아닐 것이다.

근대 건축사의 재발견, 강남교보빌딩과 SK빌딩

빨간 벽돌의 전위적인 건축_마리오보타의 강남교보빌딩

강남교보빌딩

어느 날 강남 한복판에 빨간 벽돌로 곱게 화장한 채 솟아오른 ‘강남교보빌딩’은 투명함과 날렵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하이테크 마천루들과는 달리, 빨간 벽돌의 마천루라는 기묘함으로 전위적인 풍경을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마치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듯 기묘하게 엇갈린 시공간의 주인공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자신의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다. 같은 작가가 설계한 한남동 미술관 ‘리움’의 고미술동과 비교해보면 그의 스타일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기업형 설계 사무들이 생산해낸 건물은 어느 것이 어느 회사의 솜씨인지 구분할 수 없게 모두 다 균질한 화려함과 정량의 세련됨을 내세운다. 동일성 시대에서 개인의 발언이 강력하게 발휘된 ‘작가주의 마천루’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억세게 운이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강남교보빌딩’이 가로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판적인 시선도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멋진 건물들로 둘러싸인 거리에서 개성 강한 마리오 보타의 디자인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청량하다.

도시구조를 존중하는 겸손한 자세 _ 김종성의 SK빌딩

SK빌딩

다시 한남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 남산터널을 빠져나오면, 균질한 그리드로 사면을 둘러 수학적 형태를 강렬하게 풍기는 마천루를 만날 수 있다. ‘교보빌딩’과 대구를 이루는 감성이 인상적인 종로구 서린동 ‘SK빌딩’도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흔치 않은 ‘작가주의 마천루’ 중 하나다. 도시의 풍경에 다소 불친절해 보일 수 있는 무뚝뚝한 사각형의 나열인 ‘SK빌딩’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는 것은, 건물 자체가 주변 도시 공간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 덕분이다. ‘SK빌딩’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종로길은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두터운 컨텍스트를 지닌 장소이다.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 건물을 설계한다는 것은 건축가에게 큰 중압감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인근 종각에 자리한 ‘종로타워’는 최첨단 공법을 동원한 세계적인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의 재기 넘치는 마천루 디자인이지만, 종로길을 삐딱하게 마주하는 방식이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는 표현을 빌려 비판받는다. 이에 반해 SK빌딩은 기존 도시 구조를 존중하는 겸손한 자세를 띠고 있다는 면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다. 종로길을 마주보고 있는 두 건물은 긴장감 넘치는 풍경을 자아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작가의 고집이 서슴없이 표출된 흥미로운 마천루 ‘강남교보빌딩’과 ‘SK빌딩’은 스위스 건축가와 한국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표면적 배경 외에도, 근대건축의 역사가 건축물 자체에 슬며시 관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각각의 독창성을 지닌다. ‘강남교보빌딩’의 고전적인 온화함과 ‘SK빌딩’의 미니멀한 기하학의 차이는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두 사람의 이야기로 소급한다. 마리오 보타의 스승인 르 코르뷔제(Le Corbusier)와 김종성의 스승인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는 20세기 초 서양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4대 건축가에 속하는 이들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건축학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들이다. 신조형주의를 뜻하는 ‘데스틸’(De Stijl)의 깊은 영향을 받은 르 코르뷔제는 극적인 공간의 효과를 탐구하며 면과 선의 이상적인 구성으로 형태를 만들어갔던 반면,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라는 그의 유명한 언설처럼, 건축의 구조와 기술을 최우선 요소로 드러낸 채 조형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차이점을 갖는다. 그리고 두 거장의 구별되는 지점이 ‘강남교보빌딩’과 ‘SK빌딩’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건축사의 한 꼭지가 21세기 서울에서 재발견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환경을 위한 마천루의 미래

마천루는 기술의 승리로 얻어진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중력을 거슬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겹겹이 쌓아올리는 인간의 욕망을 바벨탑에 비유하며 애써 깎아내려는 견해도 존재하지만, 공급이 제한된 토지의 효율적인 사용과 그 자체로 도시가 되는 마천루의 현대적인 공간 경험은 이미 우리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최소한의 토지에서 최대한의 점유를 의도했지만, 마천루는 자동차 위주의 도시환경을 조장함으로써 점유되지 않은 땅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역효과를 빚었다. 때문에 공공의 관점을 고려한다면, 마천루의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은 땅과 만나는 저층공간과 지하공간이다. 이 부분에서 서울의 마천루는 대체적으로 불친절하다. 보안과 안전을 이유로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공간을 만드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도쿄 시오도메에 자리한 세계 최대 광고회사 ‘덴쓰’(Dentsu)의 본사 사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보안을 생명으로 삼는 광고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저층부가 공공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음을 보고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천루에까지 스며든 ‘스트리트 문화’(Street Culture) 속에 관광객, 쇼핑객, 산보객과 사무실 직원들이 함께 넘실거리며 즐거운 풍경을 만들었다. 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자본’이란 단어가 마천루와 만나 도시를 풍요롭고 인간적인 환경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