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죄가 되는 나라가 있다. 정말 사랑이 죽을죄가 되는 나라가 있다. 얼마 전 이라크의 14살 소년이 살해당했다. 경찰에 의해. 지난해 이란의 18살, 17살 소년들이 처형당했다. 종교재판에 의해. 소년들의 죽을죄는 서로를 사랑한 죄, 동성을 사랑한 죄였다. 이라크 소년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흐메디는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남자들과 동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이라크 경찰제복을 입은 근본주의자들은 가난한 소년에게 직격탄을 쏘았다고 한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란의 소년들이 눈마저 가려진 채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 소년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울먹이는 장면, 소년들의 목에 오랏줄이 걸리는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공개처형의 참담한 광경이었다. 앞서 게이들이 은밀한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던 바그다드의 극장은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해방’되자마자 폭탄테러를 당해 예닐곱명이 숨졌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예전에 끝났지만, 이란-이라크의 게이들은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의 희생양에는 혐오범죄로 살해당하는 동성애자뿐 아니라 명예살인으로 숨지는 여성들도 포함된다. 비보를 들을 때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톨레랑스’는 한계에 이른다.
바야흐로 문화적 상대주의 시대다. 미국이 하는 짓을 보면 테러도 이해가 간다. 코란이 테러를 사주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다. 미국의 폭격이 아랍에 인권을 선물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오리엔탈리즘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이슬람의 눈으로 이슬람 문화를 보아야 한다는 말도 이해한다. 미군은 이라크의 혐오범죄에 침묵함으로써 공범임을 커밍아웃한다. 그래도 그래도 이슬람 근본주의는 용서가 안 된다. 근본주의자들은 두 얼굴의 사나이들이다. 한손에는 외세에 맞서는 총을 들고 있지만, 다른 손으로는 소수자들을 향한 억압의 채찍을 휘두른다. 집 밖에 나온 여성에게 돌을 던지고 사랑을 나눈 게이들에게 총을 쏘는 자들, 그들이 근본주의자다. 그들에게 마냥 온정적이고, 그들을 은근히 응원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속 편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되뇐다. ‘넌 평생 억압당할 일 없는 존재로구나.’ 두 얼굴의 사나이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활약한다. 카스트로의 혁명은 아름다웠지만, 카스트로의 쿠바에는 아름답지 못한 동성애자 수용소가 존재한다. 차베스의 석유 국유화에는 박수치고 싶지만, 국회 해산에는 고개가 갸우뚱한다. 인권이 없는,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 없다. 벌써 소비에트 몰락의 교훈을 잊었는가?
미제국주의는 전지전능의 변명거리가 아니다. 고 김선일씨가 인질로 잡혀 있을 때의 일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석방촉구 집회에서 유명한 ‘남조선’ 반미운동가가 발언대에 올랐다. 백전노장의 반미운동가는 “이집트에서 만난 할머니는 ‘아들이 성전에 나갔다’고 자랑스러워했다”면서 “이슬람 민중의 반미항전을 배우자”고 선동했다. 바로 그 성전에 나간 어떤 아들이 무고한 김선일을 인질로 잡고 있는 황당 ‘시추에이션’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지난해 서울에서 북한인권 국제회의가 열리던 때였다. 벨기에에서 온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병역거부 운동가면서 북한인권 활동가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남한 정부를 비판하면서, 인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북조선 정권에 반대했다. 불행히도 한반도에서 남한의 양심을 옹호하면서 북한의 인권을 비판하는 ‘포지션’은 불가능에 가깝다.
때때로 뜻밖의 ‘커플’도 탄생한다. 부시와 빈 라덴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동업자들 아니던가? 2003년 유엔 인권위에 성소수자 인권보호안 결의안이 제출되자 손 맞잡고 반대한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바티칸과 이슬람이 연대하지 않았던가? 왜 무하마드의 얼굴을 그려서는 안 되는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도전하고, 인권불가침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근대의 역사 아니었던가? 문제는 세속화다. 종교의 계율이 세상의 법을 지배하면, 희생양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사랑을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