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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몸 계급
정희진(대학 강사) 2006-05-12

2004년 제작된 김정화, 공유 주연의 <그녀를 모르면 간첩>은 증후적 독해를 요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사회의 주요 모순과 북한을 대체하는 새로운 타자(他者)의 등장을 보고한다. 패스트푸드점에 위장 취업한 얼짱 간첩에게 남한 청년이 사랑을 고백한다. 곤란해진 간첩이 “실은, 나 북에서 왔어”라고 털어놓자, 남남(南男)은 북녀(北女)를 이렇게 ‘위로’한다. “얘, 강북 사는 게 무슨 죄니, 괜찮아.”

이제 북한은 주적도, 타자 집단도 아닌 아예 무관심한 대상이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북’은 ‘못사는 동네’ 강북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문둥이’, ‘빨갱이’처럼 특정 시대에 혐오와 공포의 명명(命名) 대상을 보면, 그 시대 권력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이 지금은 ‘강북’이란 말인가? 정치적 무지와 무관심이 ‘쿨함’으로 포장되고, 사회학자 서동진의 논의대로 자기계발 의지가 모든 사회적 억압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현 정부를 지칭하는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희한한 조합어는 이 시대에 더이상 ‘레즈’(reds)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레드 콤플렉스 역시 그 소임을 다했는지 모른다. 북한 ‘미녀’ 응원단에 대한 남한 남성들의 환호는, 지난 세기 내내 한반도를 지배해왔던 레드 콤플렉스나 반북 이데올로기쯤은 가볍게 제치는, 외모주의 압승의 한 단면이다. 간첩도, 북한 사람도, 트랜스젠더도, 강도도 심지어 페미니스트도 여자는 예쁘면 용서가 된다!

남녀를 떠나 좋은 외모에 대한 호감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진다.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싫어하는 사람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외모주의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인 현상이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외모는 사람들의 취업, 인간관계, 자아 존중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일상을 훈육하는 사회적 모순으로 작동하고 있다. 공사 영역을 초월하여 외모는 개인에게 자원을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조건, 즉 자원의 주요 이동 경로가 되었다.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억압을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적 개입과 투쟁을 가로막는 정치적 의도가 아닐까?

외모주의는 계급적, 성별적 현상이다. 한마디로, ‘예쁜’ 몸은 노동하는 몸이나 공부하는 몸과 양립하기 어렵다. 몸은 계급문제다. 같은 비만이라도 어떤 음식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부자의 살찐 부위와 가난한 사람의 그것은 다르다. 이제 외모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견적 처리’해야 할 관리 대상이며,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복 가능한 영역이다.

여성에게 외모는 계급을 ‘결정’한다. 최근, 24번 성형수술한 남성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이후 이 남성은 사이버테러와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남자 망신시킨다”며 개인 홈피에 욕설을 퍼붓고, “밤길 조심하라”는 전화 협박에, 수술로 잘린 턱뼈 사진을 이메일로 보낸 사람도 있었다. 가해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남성 문화는 여성의 성형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남성 성형에 대해서는 격렬한 거부감을 보인다. 남성은 지식, 경제력, 정치권력 같은 사회적 능력으로 평가받는 존재지, 여자들처럼 몸에 매달리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들도 외모로 평가받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만일, 남성들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울 앞에서 얼굴과 뱃살과 각선미에 대한 비난과 자학으로 일상을 보내야 한다면 기분 좋을 리 없다. 결혼정보회사의 ‘공공연한 내부 자료’에 의하면, 신랑 평가 항목 1위는 직업(40% 반영)인데 반해 여성은 외모가 1순위다.

‘몸짱’, ‘얼짱’의 정상성(표준화)을 주 내용으로 하는 외모주의의 또 다른 피해 집단은 장애인이다. 4월20일 장애인의 날, 유명 여배우가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다가 취재진의 극성 때문에 “정작 주인공인 장애인은 뒷전”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비장애인, 그중에서도 이 배우처럼 외모 계급의 ‘브라만’들은 장애인 복지의 시혜자라기보다는 억압 구조의 일부분이다. 물론, 배우 개인과 엔터테인먼트 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외모주의 이데올로기는 생산자와 소비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구성원 각자의 몸에 깊이 체현되어 있다. 모두가 ‘부역자’인 셈이다.

저항이 가능할까? 어려운 문제다. 외모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거나 더럽고 지저분한 몸으로 사회생활을 할 사람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안의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도전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피해자가 가해 구조에 저항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이 ‘주체적 종속’이야말로, 대중독재 혹은 ‘합의독재’의 가장 생생한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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