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별을 구성하는 성분과 동일한 물질로. 다만 각 요소의 함량은 제각각이다. 억지를 쓴다면 세상 모든 사람을 잘생긴 순서대로, 혹은 힘이 센 순서대로 줄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아름답다거나 가장 강하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반하지 않는다. 인간을 다른 인간에게 매료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특정한 자질의 함량이 아니라 온갖 자질의 배열이 한 사람 안에 그려놓는 고유한 무늬이기 때문이다.
강금실 변호사가 지닌 무늬는 대중의 시선을 잡았다. 여성 최초 형사 단독부 판사(1991),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2000),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2003∼2004.7)의 이력은 주류 질서 안에서 그가 가진 경쟁력을 입증했지만 그 자리들이 요구하는 일을 실행하는 스타일은 분방했다. 허식없는 태도로 법무부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국회에 나가 흥분하거나 울먹이는 대신 의원들의 형식 논쟁 앞에서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스스럼없이 웃었다. 검찰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개혁을 논하다가 “마음을 열고 대해도 상대가 안 받아준다면 어쩌겠냐?”는 한 검사의 질문을 받은 그녀는 “그냥 울지요.”라고 답했다. 얼핏 “아님 말고”란 말인가 싶지만, 만사의 유한함을 알기에 도리어 주어진 목표에 순수하게 진력할 수 있는 사람의 일갈로 들리기도 했다. 힘들면 울고, 울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강금실 변호사는 2004년 7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임기 중 순직한 교도관에게 성금을 전하고, 지인들과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금실 변호사에게 붙여진 여러 별명 중에 ‘춤추는 검’이 있다. 엄숙하지 않고도 단호하다는 뜻과 함께, 춤추고 책 읽고 그림 보고 음악 듣기를 즐기는 그녀의 예술 취미를 넌지시 이르는 말이다. 검찰 개혁을 추진하며 그녀가 강조한 ‘독립’과 ‘견제’라는 말은 그녀의 품성을 묘사하는 데에도 쓸모가 있다. 조선희 소설가가 지적한 대로(<한겨레21> 599호), 강금실 변호사 안에는 현실적 문제 해결 능력과 낭만적인 초월의 욕구가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식목일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강금실 변호사는 진정성과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녀는 자기의 화법을 버리지 않을 셈이었다.
강금실 예비후보의 의자는 그리 푹신해 보이진 않는다. 정치를 타락의 숙명을 안은 절대반지처럼 여기는 회의론자들은 “망하거나 다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라는 투로 염려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녀가 이미지로 현혹하려드는 아마추어라고 의심한다. 약속장소로 가는 밤길에 목련 나무가 하얗게 빛났다. 선거 캠페인 같은 번다한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짧고 어여쁜 계절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10년 전 쓴 칼럼에서 목련을 “그에게 걸어가는 동안 뚝뚝 져버리고 없는 꽃”이라고 불렀던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강금실 변호사는 성당에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카페에 도착했다. 형형한 눈빛이 그래도 가시지 않은 피로로 까슬까슬했다. 부활절 미사에서 받아온 삶은 달걀을 까서 허기를 달랜 그녀와 대화를 시작했다. 20분쯤 문답이 오갔을 때 강금실 변호사는 무심코 말했다. 저는, 생각하는 것이 좋아요. 생각이 취미예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녀를 만나길 원했던 이유였다.
-인터뷰 일정을 조정하다가 선거 기간에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좀 놀랐습니다. =원래 사람이 그래야죠. 더군다나 요즘은 주 2일을 쉬는 시대인데(웃음)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있어요. 선거를 겪어보니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일정에 지쳐서 상태가 나빠지는 거예요. 사람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자꾸 자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고, 특히 선거 상황에서는 더 위험해요. 저는 선거를 통해 얻어야 할 효과를 전제로 전략을 짜는 게 아니라, 선거를 통해 하려는 일을 전제로 전략을 짜다보니, 기존 방식과 충돌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저도 흔들릴 수 있고요.
-퇴임 뒤 유럽여행을 다녀오셨는데 왜 스페인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알람브라 궁전이 있지 않냐고 답하셨죠. =그냥,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이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가서 진짜 좋았던 건 ‘아랑훼즈의 추억’이었어요. <아랑훼즈 협주곡> 있죠?(멜로디를 흥얼거린다) 아랑훼즈는 마을에 가까운 소도시인데 들어서는 순간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바로 여기야!”를 외쳤어요. 작고 호젓하고 맑고 조용하고 강이 흐르고 낙엽이 있었어요.
-지금 부활절 미사에서 오시는 길이죠? 장관 퇴임 뒤 유럽여행 중에도 주일이면 미사를 챙겨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교 신도였다가 2004년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무교였다가 종교를 갖는 경우보다, 하나의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긴 경우가 당사자에게는 더 심각한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도였지만 수행을 오래했거나 절을 꾸준히 다닌 신자는 아니었어요. 집안이 불교였고 스스로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거예요.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는 영성을 인정하느냐 여부예요. 부활이란 것이 그렇잖아요? 물론 소승불교쪽에는 윤회설이나 영적인 부분이 있지만 불교는 사실 철학에 가깝죠.
-그러니까 불교에는 없는데 천주교에는 있는 영성이 중요했다는 말씀이네요. =영성의 삶, 보이지 않는 무엇, 드러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편이에요.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삶에 동의하고 신뢰한 것이죠. 고난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사흘간 예수의 경험, 육체적 삶에서 그런 고난을 겪고 영적인 삶으로 질적인 비약을 이루는 그 부분이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의 핵심이에요.
-옛날 사진을 보니 오랫동안 긴 생머리 스타일을 유지하셨던 것 같은데 언제쯤 지금의 짧은 머리 모양으로 바꾸셨나요? =대학 때부터 긴 생머리를 하다가 긴 파마머리도 하고, 땋고 묶고 다녔죠. 처음 머리를 자른 것이 1997년 변호사 개업하고 1년 뒤였어요. 그때까지는 긴 머리에 스커트도 길게 입고 다니다가 무릎길이 치마에 짧은 머리가 되었죠. 화장은 서른네살부터 했고요.
-세세히 기억하시네요. =화장을 처음 시도했다 실패한 기억이 있거든요. 1988년 부산 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할 때 친척이 트윈케이크를 사줬는데 밀려서 못 바르고 포기했거든요. 그러다가 밑화장을 시작했고 그러다 입술도 칠하고 눈썹도 그리고 마스카라까지 바르게 되고. 점점 늘어간 거죠.
-어린 시절 전학을 자주 다녔고 가정환경에 편차가 많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 방어나 적응법을 깨우치는데요. =환경변화가 잦으면 아이들이 정서가 불안해진다고 하지 않아요?(웃음) 국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간 것도 아니고 서대문, 아현동, 원효로에서 환경이 오십보백보인 비슷하게 가난하고 고만고만한 학교를 다녔는데도 학교마다 아이들도, 분위기도 너무 달랐어요. 적응이 힘든 면이 있었는데 그나마 공부를 잘한 덕택에 전학 간 다음 학기에 반장이 되고 천덕꾸러기를 면한 것 같아요.
-1등을 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았습니까? =겉보기에는 1등 해서 적응하고 상위 그룹에 들어가는데, 내면은 어딘가 멀어져 있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아이들과 어울려 있었지만 학교 분위기를 떠올리면 구경하는 사람의 시점으로 기억나거든요.
-그렇군요. 뉴스나 토론회를 보면서 당장 처한 상황이 급박해도 머리는 그때 그때 다른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차단 능력이 있는 분이 아닐까 상상했습니다. =제가, 원래 딴 생각이 많아요. (웃음) 상상, 생각을 많이 해요. 제 취미는 사실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하는 걸로 버티고 사는 것 같아요. 출마선언을 일주일 미룬 것도, 정책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전부 이해하고 생각하고 납득해서 내 것이 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요.
-<법률신문>에 공동체를 숙명으로 하는 인간의 삶에서 사법부의 역할을 사제의 그것에 비유하는 글을 쓰신 적이 있는데, 그런 생각이 법학과를 선택할 때부터 있었나요? =(전공을 선택하기 전인) 1학년 때는 김현 선생님 불문학 강의며 인문대 강의도 듣고 좀더 적성에 맞는 과목을 해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아, 이거다!” 싶은 걸 못 찾은 상황에서, 법학은 그래도 공공성이 강하니까 다른 학문보다 낫겠다 싶었던 것이죠. 법대 가서도 공부는 별로 열심히 안 했어요. 법철학을 조금 열심히 들은 편이었고.
제 취미는 사실 생각하는 거예요
-공공성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인간이란 의미를 찾잖아요. 고3 입시 끝나고도 종교학 공부를 했고 불교 관련 책, 신학 책은 거의 다 읽었어요. 폴 틸리히니 에리히 프롬이니 많이 읽었죠. 독학을 많이 했죠. 그래도 답이 안 나온 건 너무 어려서였겠죠.
-변호사님의 대학 시절이 유신 말기였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과 개인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상충하고 서로 배척하는 시기였을 텐데요. =만날 친구들이 잡혀가는 황량한 시절이었죠. 저는 눈을 질끈 감고 지나가지 못하고 가책을 받는 편이었어요. 1960년대 4·19 혁명이 실패한 뒤 우리의 세계관이 불분명한 때 사회이론서가 들어와 지식인들의 가치관을 형성한 때였죠.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해방신학, 헤겔, 그 흐름이 나중에는 레닌까지 갔죠? 저항을 위한 사유의 바탕이 공동체를 강조하고, 그것이 학생사회 주류가 되다보니 개인의 취향을 부르주아적 취미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1980년대 들어 더욱 심해졌죠. 우리도 개인이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즐기고 느끼는 걸 명분에 많이 억압당한 세대인데, 80년대는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와중에도 웬만큼 할 건 했는데. (웃음) 탈춤반에서 춤도 추고 양대 산맥이었던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도 많이 읽고.
-재학 시절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음악감상실에서 고전음악 DJ를 하셨다고요. =DJ까지는 안 되고, 1·2학년 때 클래식을 많이 알고 DJ를 하는 탈춤반 선배가 있어서 해볼까 몇번 갔는데, 하긴 뭘 했겠어요. 데이트는 했죠. 음악감상실 DJ하고. (좌중 폭소) 아까 밀려서 못 바른 트윈케이크처럼, 갑자기 기억이 나네. 이과 동기생이 쪽지를 전해주는데 보니까 데이트 신청이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이런 걸 줬냐고 팔팔 뛰었거든요? 그 선배가 자기라고 말하는데도 내가 못 알아듣고는 한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나중에 민망했죠. 거절하기 어려워서 남산에 가서 추송웅씨의 <빨간 피터의 고백>인가를 본 기억이 나네요. 그게 첫 데이트였어요. 1학년 때는 그래도 데이트 신청이 많았는데 내가 너무너무 철이 없어서 무조건 거절부터 했어요. 지나고 나면, 다 후회된답니다. (웃음) 진짜 안타까운 추억도 하나 있어요. 1학년 때 학생식당에 앉아 있는데 예비군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식판을 들고 와 건너편에 앉으며 밥을 같이 먹자 그랬죠. 다짜고짜 일어서버렸는데, 가면서 슬쩍 보니까 멋있는 거예요.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고 지나간 거죠. 너무 후회돼요. 호호. 한번 찾아볼까봐요. (웃음)
-집필한 칼럼들을 보면 “인간은 혼자다”, “혼자인 인간들은 그러나 같이 살아야 한다”는 두개의 움직일 수 없는 명제를 계속 주문처럼 되풀이하십니다. =무엇 하나도 버릴 수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는 원래 있었고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은 밖으로부터 왔는데 그런 인식이 20, 30년 되고보니 갈등이 점점 사라져가요. 요즘은 내가 아무리 이건 ‘나’라고 주장한다 해도, 우린 너무 많이 이미 결정돼 있다는 걸 느껴요. 지금 이곳에 태어난 것도, 생김새도, 성격도. 그래서 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여러 인간이 같이 사는 것이 점점 분리가 안 돼요. 결국은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가는 과정과 관계 속에 개인의 인생이 있지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변호사 개업 당시를 회고하시면서 “비참하게 개업을 했다”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판사 일에 정착해서 뭔가 알 듯하고 재미를 느낄 즈음에 어쩔 수 없이 변호사 개업을 했다는 의미 같았는데요. =등 떠밀리는 기분이었어요. 판사들은 공직자 윤리의식으로 항상 사생활을 규제하는 사람들이에요. 사법연수원을 나와서 다른 사회경험 없이 바로 판사생활만 13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가둬온 규율이 사라졌을 때 내 정체성이 뭘까라는 질문과 마주하는 것이 우선 두려웠어요. 또, 스스로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선택하고 결단했으면 좋은데 그때는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밀려 개업했으니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거 같아요. 경제적 필요였다 해도 내가 적극적으로 일을 만들어갔다면 재미있을 수 있는데, 당시는 내 성격 자체가 돈 버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던 거 같아요. 지금이라면 돈 버는 데에 적극 나섰을 수도 있는데. (웃음) 너무 힘들어서 후유증도 남았지만 힘겨움이 나를 키워주기도 했어요.
-소송에 불만을 품은 쪽에서 보낸 조직폭력배 같은 인물이 변호사 사무실에 언젠가 들이닥쳤다가 강 변호사님한테 욕만 잔뜩 듣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던데요. =사건 결과가 마음에 안 차니 보수를 깎아달라고 말했다면 귀를 기울였을 텐데, 다짜고짜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힘을 과시하며 쳐들어오니까 화가 난 거죠. 조그만 여자라 압도하려고 왔을 텐데 오히려 덤벼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여러 사람이 만드는 과정과 관계 속에 인생이 있어요
-법무부 장관으로서 검찰개혁을 추진하던 즈음에 검사들을 순정한 눈사람에 비유한 이메일을 보내 화제가 됐습니다. 그 편지 가운데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구나”라는 감정을 “이 사람들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소망 같은 것”이라고 다시 쓴 구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글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숨어 있어요. 사람들이 눈사람 이야기에 집중을 했는데 실은 “ 이 사람들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구절은 사실 의미를 좀 담은 대목이었어요. 어쨌거나 개혁 작업은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분들이 나와 동일한 상태까지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앞으로 서울시 선거캠프도 시적으로 끌고 가야 하는데 바쁘고 힘들다보니 열흘 만에 벌써 흐트러졌네요. 다시 시적인 감각으로 수습해야 돼. (웃음)
-검사들에게서 받은 답장 가운데 기억나는 편지는 없나요? =수십통 받았는데 어느 지방에 계신 여검사는 울었다고 하더군요. 검사들은 굉장히 애국자고 헌신적이고 자기 일에 자부심이 강하세요. ‘독수리 오형제’ 같은 사명감이 있어요. 실제로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고요. 몇몇 조직 운영상의 문제나 특정 사건 때문에 전체적으로 욕먹는 일이 많으니까 우리를 이해해줬다는 것이 감명 깊었다고 쓰셨어요. 검사들의 그런 소신이 꺾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고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검찰개혁이죠. 큰 사건일수록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연관돼 있으니 검사가 굉장히 시달리죠. 법무부 가서야 알았어요. 수사를 많이 한 검사일수록 모함에 시달리고 함정에도 빠져요. 그래서 법무부에 진정서가 들어오면 그 맥락을 잘 가려 분류해야 해요. 정말 문제가 있는 예와 모함이 섞여 있거든요. 네거티브한 선거판도 마찬가지겠죠. 권력에 가까이 갈수록 권모술수와 음해공작이 많아요. 정치판을 겪어보니 <조선왕조 500년>에 나오는 것이 사실이더라니까. 만날 방에 모여 앉아 수군수군하고. (웃음)
-알려진 대로 가족의 사업실패로 빚이 많아 공직자 재산으로 마이너스 6억여원을 신고하신 바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 채무자들의 희망이라고 불리시기도 하던데요. 경험자로서 빚은 사람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보세요? =한강에 투신자살한 시신 가운데 살고자 하는 미련의 흔적이 안 보이는 시신은, 빚에 몰려 죽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나는 빚이 다른 불행들과 갖는 차이는, 다른 것들은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고통이라 극복이 가능하지만 빚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라고 봐요. 누구를 잃거나 내가 다친 것은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데 빚은 그게 안 돼요. 자기보다 센 상대가 나타난 것인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약점을 인정하기 싫어하니까 막으려고 달려들고 그러면 무모해져서 빚 막기가 지상 목표가 되고 그 다음엔 염치도 없어져요. 제가 빚 많은 분들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돈의 힘이 더 커질 때 빚으로 빚을 막지 말고 단칼로 끊고 정리하라는 거예요. 그러지 못하는 건 익숙한 생활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데 그때 멈출 수 있는 정신을 잃지 않아야 다음 삶을 살 수 있어요. 저 역시 실패를 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실패 뒤에 저는 굉장히 냉정해져서 절대 질질 끌려가며 살지 않게 됐어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사람이 못살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김기덕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이 통념을 깬다는 게 충격적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게 보셨다는 감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음란물 여부를 가리는 재판에서 변론을 맡았던 장정일 작가와 김기덕 감독은 굉장히 종교적인 예술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정 장르가 아니라 해도 본인이 이런 것에 끌린다 싶은 예술의 경향이 있나요? =근원을 추구하는 작품에 확실히 끌리는 것 같아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을 좋아했어요. 영화로서는 지겹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잖아요. 김기덕 감독 영화는 딱 두편 봐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통념을 깬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한국영화에서 그렇게까지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는 영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회화적 스타일도 특이하지만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이었어요. 보통은 어떻게 만났건 사랑처럼 흘러가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몹시 흉측하잖아요? 굉장히 사랑을 원하는데 현실적으로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인간의 심리상태가 김 감독에게선 느껴져요.
-저널보다 문학을, 그중에서도 산문보다 시를 좋아하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화와 시를 무척 좋아해요. 제 취향은 심오한 것보다 짧은가, 쉬운가가 기준이에요. 보르헤스의 단편도 무척 좋아해요.
-장관직을 퇴임하고 쉬는 동안 전생, 미확인 비행물체, 연쇄살인사건 TV시리즈에 중독됐다고 하셨는데요. =여름 내내 봤는데 한이 없어요. 호호. 법률가 적성인지 미스터리영화와 추리소설을 좋아해요. 내가 좋아하는 미스 마플과 포와르 시리즈는 자정을 넘어서야 방영하더라고요. 포와르와 <제시카의 추리극장>이 정말 재미있어요. 추리소설은 피서법의 하나인데, 웬만한 정격 추리소설은 다 읽었어요. 엘러리 퀸, 에드거 앨런 포도 좋아하죠.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결혼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변호사님은 결혼 계약이 감정과 뒤엉켜서 끝났다기보다, 우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결혼을 끝낸 경우라는 짐작들도 있습니다. =감정과 결혼제도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살면 살수록, 사람이란 존재는 결혼이란 걸 통해서 대지에 뿌리내리기를 하는 거 같고, 또 사람은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로 가는 거죠. 연애와는 다른 사랑이죠. 아이를 낳아 생명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사람이 연애감정으로 어떻게 계속 사랑할 수 있겠어요. 연애가 그처럼 지상에서 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그리움을 부르는 측면이 있지만 존재로서 현실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이 정말 공고한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려는 꿈을 버리진 못하는 거죠.
-회의주의자의 낙천성이 느껴집니다. 언제나 끝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오히려 가질 수 있는 낙천성이랄까. =두 가지 측면이 다 있어요. 나이가 들어보니까 사람 사는 게 그렇게 큰일도 비천한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부터 사는 법을 잘 배웠더라면 싶어요. 왜 학교에서는 살아가는 법을 안 가르쳐주고 다른 것만 가르쳐줄까요! 인생사는 법, 생각하는 법, 어려움이 닥칠 때 대응하는 법, 연애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잖아요. 뉴스에 나왔는데 중국에서는 정말 청년남녀를 위한 연애학원이 생겨서 열심히 특강을 받더라고요. 우린 너무 그냥 던져지는 것 같아요. 가족관계나 학교에서 배운 것 갖고 너 알아서 살아, 그런 것이죠. 지금 아는 걸 좀더 일찍 알았다면 인생이 그리 무서울 것도 없고 돈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도 창피할 것도 없고 그냥 내 자리에서 살면 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죽음의 인식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잖아요. 감명 깊었던 교리가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라는 구절이에요. 지금을 항상 종말과 같이. 지금을 내가 죽는 시점과 일치시켜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고 나면,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데” 하는 여유가 생기잖아요? 지금이야말로 제게 그 여유가 필요하겠죠.
-출마 결단에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겠지만 역시 본인이 정치 행위에서 모종의 재미를 발견하셨기 때문에 움직였을 거라고 짐작하는데요. =정치에 재미를 느낀 건 아니고 전문가들에게 서울 시정 이야기를 듣다가 재미를 느꼈어요. 실제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바꾸기 위해 연구,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보통 살면서 고민하는 주제들과 전혀 다르지 않더군요. 똑같은 고민, 생각, 가치인데 다만 문제의 주체가 서울시인 거죠. 삶을 포근히 안아주는 미시적 접근에 대한 요구가 많아서 인상 깊었어요.
-무엇을 할 것인가도 관심사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도 관심거리입니다. 얼마 전 이 인터뷰에 모신 건축가께서는 시민이 제안하고 전문가가 돕고 관이 추진하는 순서가 마땅한데 절차가 역전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치권이나 공무원 사회가 무시하는 형식이 실은 그 프로세스라 할 수 있죠. 프로세스가 자유, 평등, 인간다움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를 회복해야 내용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지금까지 이것을 무시했어요. 형식과 절차에서 관료주의를 깨지 못한 것은 참여정부의 상당히 큰 실패원인 중 하나예요. 우리는 예쁜 것을 즐기는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이념과 미적 취향, 절차의 자유로움이 잘 공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깨져야 할 부분이에요. 업적 중심으로 가면 공무원은 바뀔 수가 없어요. 법무부 장관 시절에도 경험했지만 형식의 변화가 이뤄지면 공무원 스스로 자신의 일과 삶을 바꿔나가요. 시장은 공무원 스스로 바뀌도록 기회와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래서 공무원이 밖에 있는 시민과 똑같은 감수성으로 시정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해요. 하루아침엔 안 되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사는 걸 좋아하게 돼 있거든요.
-정치계에서 흔히 쓰는 것과 다른 언어를 쓰십니다. 출마선언문에서 진정성을 언급하셨는데 예술에서 자주 쓰는 개념입니다. 정치를 예술이나, 진심을 소통하는 연애와 비슷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진정성은 진실한 마음이라는 뜻이죠. 나도 걱정은 되지만 효과는 벌써 있다고 봐요. 제가 네거티브 전략을 하지 않고 있기에 한나라당에서 누가 나오건 네거티브 전략을 쓰기 힘들 거예요. 정치 영역에 대한 불신은 저도 깊이 고민했지만, 결론은 정치라고 해서 사람의 삶에서 다를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술에서 느끼는 소통과 자유로움으로부터 비교적 먼 영역이긴 하지만 정치도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치에서도 예술처럼 소통과 자유로움을 느껴야 해요
-시장 선거 출마를 법무법인 지평의 동료들께서는 반대하고 오히려 문화계 지인들이 찬성하셨다고요. =당연하죠. 돈 벌어야 하는데 대표 변호사 출마하는 걸 누가 좋아해요. 인력손실에다가, 나 때문에 벌써 얼마나 피해를 봤어요? 사실 이번 출마가 지금껏 제가 내린 제일 큰 결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다시 돌아갈 데가 없어요. 법무부를 떠났을 때는 지평으로 돌아갔고, 이번에도 낙선을 하든 당선되어 4년을 일하든 그 다음에는 고향과 같은 지평으로 돌아가야지. 대표는 할 수 없겠지만 그냥 일할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그 계획은 완전히 접게 만들어준 것이 한나라당이에요. 이렇게 누를 끼쳤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어요.
-그럼 만약 낙선하면 뭘 하고 살지도 궁리하셔야겠네요? =그러니까 당선이 되는 게 좋죠. 돌아갈 데가 없으니까. (웃음) 나오자마자 한나라당이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렸으니, 덕분에 퇴로없는 행진만 남은 거죠. (웃음)
-격류 속으로 자기를 던지고 어디로 휩쓸려 가나 두고 보려는 충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기 넘치는 모험 정신 때문이 아니라, 내게 남은 것이 뭐 있나 하는 면이 있다는 거죠. 나를 던질 때마다 지금의 삶을 접고 강을 건너는 느낌이에요. <공무도하가>처럼. 자기를 비장하게 던져봐야 죽지 않는 이상 사람은 별로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니, 요즘은 죽어도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갈 뿐. 지금도 선거하는 게 맞나 싶은 것이 선거 속에 들어왔는데 출마선언 전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내가 계속 있어요. 선거 과정이 내게 어떤 영향을 줄까, 지켜보는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