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하게 분노하라.’
그러면 모든 게 다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바르게 사는 셈이고, 당연히 세상도 좀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노동자들이 대형 크레인에 올라가 항의할 때 ‘고공농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 무렵이고, 농민들이 쌀수입 개방문제 때문에 경운기를 몰고 서울로 향하는 모습에 심정적으로 깊이 기울어졌던 것도 이 어름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모든 눈과 마음에 거슬리는 일상사까지 따지는 식으로 이어졌다. 왜 아파트 경비원들은 이런 대형 덤프트럭이 마구 들어와 매일 밤 주차까지 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여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다니는데! 어떻게 한국 최고의 문화거리라는 인사동에서 파는 특산품에 영문 설명이 하나도 없어요? 아니, 그 박스는 메이드 인 차이나, 이거 중국산이잖아요?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였으며, 나는 스스로 작동시키는 비판과 분노의 메커니즘에 빨려들어가 끝내 절망 속으로 찌그러들곤 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체념이라는 걸 배워가야 했다. 한데 이번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밀고 들어온 외국 자본이 마음을 밑바닥부터 뒤집어놓는다. 대통령마다 외자니, 자유무역협정(FTA)이니 떠들어대는 사이 이자들은 완전히 칼잡이가 돼 우리 기업을 요절내버린다. 한국의 최우량 기업 대부분에 대한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는가 싶더니, 어느덧 한방에 수천억∼수조원을 먹고 튀는 자까지 생겨난다. 야, 이제 보니 진짜 도둑놈은 따로 있네! 제XX! 저 무지막지한 헤비급 애들하고 일대일로 맞장 떠서 이기는 게 이기는 거라더니, 그게 무슨 투명성이니 재벌개혁이니 뭐니 떠들어대더니….
그런데 다시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아니, 뭔 자동차그룹에서 비자금은 그리도 많이 조성했다는 거야! 그리고 돈 써서 부채를 탕감받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아무리 지분율이 낮아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공적자금 건드리면 문제가 안 생길 것 같아? 오히려 나중에 승계 시나리오에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텐데…. 양키들이 가만히 놓아둘까, 이 호기를? 아니, 이미 작업을 해왔는지도 모르지.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우량 기업에, 1대 주주의 지분율이 낮은 기업을 양키 칼잡이들이 멀거니 보고만 있었을까?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인데, 왜 그 회사는 그리도 자기네 사람들을 보듬어 안지 않았던 걸까?
그러던 차에 KBS <신화창조>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산업디자이너를 봤다. 김영세. ‘디자인의 구루’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그는 몇 가지 점에서 깊이 깨닫게 해준다.
“나는 필요한 걸 찾다가 없으면 기뻐요. 오히려 기쁘게 그걸 창조해내는 거예요. 내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도 필요할 테니까.”
그는 ‘불만’을 ‘창조’로 승화시키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떠나며 골프가방을 가지고 가려는데 여러모로 불편했다. 결국 새롭고 편리한 수납공간을 갖춘 멋진 여행용 골프가방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전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훤히 보인다. 골프를 전혀 치지 않지만, 그 회사 탓을 하고 사회구조 탓을 하고 한국 탓을 하고 스스로 스트레스만 잔뜩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과거 나를 괴롭힌 불만 가운데 몇몇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괜찮은 느낌까지 보너스로 받는다.
두 번째 가르침도 훌륭하다. 그가 바로 그 개량형 골프가방을 제작한 뒤 판로를 찾아 분투하고 있을 때다. 마케팅이 안 돼 재고품만 쌓이고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절박한 마음에 전국 곳곳 골프장을 직접 찾아가 판촉 활동을 벌일 때 한 기업의 회장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은 디자이너니까 디자인 자체를 해야지… 앞으로 한 가지 제품에만 매달리지 말라.”
이 말을 듣고 그는 디자인에 전념한다. 결국 MP3 디자인 혁명으로 세계시장을 휩쓴 아이리버를 비롯해 ‘가로본능’ 휴대폰, 라네즈 화장품의 슬라이딩 팩트, 후면조망 자전거 등 세계적인 히트상품을 잇따라 디자인해낸다. 그는 천재이면서도, 동시에 남의 말 한마디도 헛되게 흘리지 않는 열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이 사람에게도 이런 관념의 현미경을 들이밀려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 밑에 있는 디자이너 40명의 고용·노동관계는 괜찮은 거야?” “근데 그 사람 진보야, 보수야?”
다 좋은데, 지금은 배울 것부터 제대로 배워보자. 불만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가치부터 만들어보자.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배우는 자가 강해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