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된 오슨 웰스
1999년, 감독 조지 히켄루퍼 출연 윌리엄 허트 장르 드라마 (SKC)
“만일 한 사람의 인성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 링컨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영화 <킹 메이커>는 정치권력에 드리운 비열한 음모와 탐욕, 그리고 계략에 관한 정치드라마이다. 한데 이 영화 속에서 권력이란 정당하게 획득되고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는 근엄한 것이 아니라 비열한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치장된 퇴폐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권력이란 근원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미국 주지사 선거전이 한창인 미주리주. 언론재벌인 아내의 든든한 지원 속에 차기 대권후보로도 지목되고 있는 블레이크 펠라린(윌리엄 허트)의 우세 속에 선거전이 한창이다. 그런데 블레이크의 도덕성에 일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케네디-닉슨 시절 유력한 정치가였으나 이후 쿠바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던 킴 메나커(나이젤 호손)가 등장해 블레이크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쌍둥이였던 블레이크는 유년 시절 양부였던 킴 메나커 아래서 성장했으며, 자신의 출생증명을 조작해 형을 대신 베트남전에 참전케 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기자 브렌디니(이렌 야곱)는 정치권의 비열한 진상을 꿰뚫으며 블레이크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만으로는 전형적인 선거영화의 컨벤션을 따르는 긴장감과 스릴로 채워질 법도 한데, 실상 주요한 장면과 사건들을 통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들이댄다. 가령 긴장감 있게 전개되는 오프닝의 선거유세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영화는 펠라린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악몽 같은 기억들을 교차편집하기 시작한다. 쌍둥이 형제의 유별난 애증관계는 물론이고, 킴 메나커와 맺는 동성애적 관계 혹은 의사 근친상간의 관계를 보면 이 영화가 정치 스릴러라기보다 오히려 모호한 심리극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데 그 낯선 외관을 비집고 들어가보면, 한 가족사와 정치사에 상통하는 권위와 억압, 그리고 복종과 저항이라는 위계의 권력관계가 지도처럼 그려진다. 이 영화는 오슨 웰스판 . 웰스가 남긴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시민케인>이나 <맥베스> 등에서 보여줬던 오슨 웰스 특유의, 탐욕스런 권력의 긴장감과 갈등을 심리적으로 풀어내는 화법의 흔적들이 이 영화의 대략적인 이야기 구도 속에서도 비쳐진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무게 때문인지, 이 영화의 스타일과 연출력은 스토리의 치밀한 내적 긴장감을 따라 호흡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의 감독은 조지 히켄루퍼. 그는 반전운동가였던 어머니와 극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화 속에는 정치적 관점과 미학이 투영되어야한다”는 가르침을 늘 상기한다지만, 그것을 먼저 실천했던 거장 오슨 웰스를 따라가기에 이 영화는 아직 버겁다.
정지연/ 영화평론가 woodyall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