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에 다녀왔다. ‘한국 영화계의 중국시장 진출 현황을 알아본다’는 엄숙하면서도 거창한 주제를 취재하기 위함이었지만, 관심의 한구석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DVD, 아니 정확히 말해 불법복제 DVD였다. 중국말로 ‘다오반’(盜盤)이라 불리는 이 해적판 DVD의 세계가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베이징 곳곳에 자리한 해적판 DVD 가게는 일단 규모 면에서 대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 방대한 컬렉션이었다. 매장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할리우드영화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구석구석을 뒤져보니 다종다양한 영화들이 꽂혀 있었다. 따끈따끈한 한국영화는 물론이고 중국영화, 홍콩영화, 일본영화, 유럽영화, 중동영화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버스터 키튼의 초기작 모음에서 중국영화의 태동기 작품, 허우샤오시엔의 전작 박스 세트, 루이스 브뉘엘의 거의 모든 작품의 프랑스판 DVD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고전 마스터피스가 중국어 자막이 붙은 채 우리 돈 800원에서 2천원 사이에 팔리고 있었다. 몇 군데 가게를 합치면 거대한 시네마테크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누군가의 예술적 창작물을 훔치는 일을 찬양하거나 장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일말의 이해도 된다. 베이징에는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시네마테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고전 걸작을 접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 다오반뿐이다. 놀라운 일은 희귀본에 가까운 이들 DVD들이 활발하게 팔린다는 점이다. 그네들 물가 수준에서는 만만치 않은 가격일 텐데 이런 영화들을 산다는 것은 적지 않은 중국 젊은이들이 영화사의 걸작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현재 부흥하고 있는 중국 영화산업은 이 젊은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줄지도 모른다. 누벨바그 그룹이 시네마테크를, 쿠엔틴 타란티노가 비디오가게를 터전으로 삼았듯, 제7세대 중국영화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오반으로 섭취한 이들에게서 시작될 수도 있다. 중국영화의 10년 뒤가 기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한 가지 질문, 최신 개봉작을 주로 섭취하는 한국의 불법 다운로드 세대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10년 뒤가 걱정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