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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감독들 신작 엿보기 [2] - 박진표

목소리의 그 놈을 현상수배합니다

박진표 감독의 <그 놈 목소리>

촬영시작 6월 제작 영화사 집 개봉예정 12월

완성된 <너는 내 운명>을 보고 나서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촬영 전 인터뷰 때 단순한 ‘통속사랑극’이라고 누차 강조하는 박진표 감독의 내심을 알 듯 모를 듯했던 터였다. 진짜 뭘 만들고 싶은 걸까, 알 수 없었다. <너는 내 운명>은 말 그대로 통속사랑극으로 눈물을 자아냈지만 그 자체가 시대를 거스르는 메시지인 작품이었다. 6월 촬영에 들어갈 <그 놈 목소리> 역시 실화를 극화하는 작품이며, 이번에도 감독은 ‘정말 단순하다’라는 말을 죽도록 되풀이한다. “그냥 그놈 잡으려는 목적으로 만드는 영화일 뿐”이라고. 물론 믿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극의 뼈대가 되는 사건의 개요가 심증을 굳힌다. 1991년 1월29일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한 아이가 유괴당하고, 아이의 부모는 44일 동안 60∼70차례에 걸쳐 7천만원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를 받는다. 비공개 수사가 펼쳐졌고, 범인은 여기로 가면 저기로 오라는 쪽지를 남기는 무인 포스트 작전까지 벌이며 뺑뺑이를 돌렸는데 44일 만에 아이가 사체로 발견됐다. 그런데 결국 범인을 못 잡았고, 얼마 전인 1월29일에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박진표 감독은 당시 조연출로 이 사건을 취재했고 1992년 3월31일 <그것이 알고 싶다>의 ‘이형호 유괴사건-살해범의 목소리’편으로 방송을 내보냈다.

박진표 감독의 작품들은 ‘영화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새삼 던지게 만든다. <그 놈 목소리>도 예외는 아니다.

-구상한 지 꽤 오래된 작품 아닌가. =구상은 15년 됐다. 1991년에 있었던 유괴사건이고, 방송사 조연출로 있을 때 <그것이 알고 싶다> 첫회 때 취재해서 방송했던 사연이다. 그 이후 가슴속에 항상 담겨 있었으니 15년을 묵혀온 셈이다.

-범인을 못 잡았으니 피해자 중심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겠다. =정말 순수하게, 아이를 빼앗긴 부모의 심정을 솔직하게 따라가는 휴먼드라마다. 유괴사건이라면 범인과의 승강이 때문에 스릴러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배제하려고 했다.

-형사의 비중은. =범인의 협박 목소리에 온 수사를 집중하는데 사실 무기력하다. 협박전화가 오지 않으면 수사 진행이 되지 않으니까. 부모에게 각각 한명씩 전담 형사가 붙어 있다.

-미제사건이고 죽음이 개입돼 있다는 면에서 <살인의 추억>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럴 수 있는데 다른 영화가 될 거다.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겐 굉장히 단순하고 특별한 목적이 있다. 그놈을 잡고 싶다. 법적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이 아이들, 특히 부모의 공소시효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에는 무기력한 사회상이나 정치적 배경 같은 게 들어가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살인의 추억>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만든 게 아니니까.

이번에도 실화가 바탕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무정부주의자 배두나가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다고 계급적 차원에서 말하는데, 유괴 자체에 대한 시각은. =<복수는 나의 것>도 많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지만 유괴에 대해 철학적 시각이나 심오함이 없다. 정말 단순한 목적으로 만드는 영화이고, 유괴는 무조건 나쁜 짓이라는 시각이다. 아이들에 대한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제일 먼저 늘리거나 없애야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주변의 아이를 잡아간 녀석이 주변에 있는데 그걸 꼭 잡아야 한다는 단순한 목적, 그래서 제목도 ‘그 놈 목소리’로 했다. 잡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심오함이나 철학보다 우선시되는 단순목적극이다. <너는 내 운명> 때 통속사랑극이라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 심정은 ‘전 국민 현상수배극, 그 놈 목소리’였다. ‘전 국민’이라는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그걸 빼고 ‘현상수배극’이라고 붙였다. 엔딩에 음악 대신 그놈의 실제 목소리를 틀 거다. 만약에 두 시간 동안 진심으로 분노와 슬픔이 느껴지게 잘 만든다면, 음악 대신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무의식적으로도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한다. 남아 있는 그 목소리가 15년 동안 가슴에 묻어온 걸 토해낼 수 있는 계기였다. 잘 모르겠지만, 드러내놓고 이런 목소리 듣고 신고하라는 현상수배극의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너는 내 운명> 때에도 대단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매번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게 사실이다. <죽어도 좋아>에선 노인의 성과 사랑, <너는 내 운명>에선 이 시대의 사랑법에 대한 경각심. 이번에는 무엇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냐라는 측면에서 또 던지고자 있는 게 있을 것 같다. =이것도 사랑의 한 형태인데, 단순하게만 생각해도 유괴된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그 주변 사람들이 있는데 아이가 죽어서 왔고, 범인은 못 잡았으며, 범인은 아직 살아 있다. 웃고 있을지 미소짓고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 사회가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용인하는 사회다. 영화를 보고 나면 공소시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나 아니면 착한 유괴, 나쁜 유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나 추측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목적을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다. <너는 내 운명>도 그랬다. 정말 단순하고 무식하게 축복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이런 사랑이 있으니 인정해주고 부끄러워해라, 라는 건 나중 문제였다. 축복해줌으로써 이러이러한 경각심, 편견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했던 거지만. <그 놈 목소리>도 일차적으로 아이의 원혼을 달래고 부모의 맘을 달래는 것이다. 이차적으로 이런 범죄가 있으면 안 되겠다는 것과 법적으로 15년을 공소시효로 정해놓고 엄연히 피해자가 살아 있는데 봐줄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

재밌는 건 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였고, 특히 강조했던 게 유괴 같은 파렴치범에 대한 단죄였다. 그런데 실적 중심의 수사가 이뤄지면서 유괴, 살해 같은 강력범죄가 더 늘어났다. 이런 숨어 있는 배경이 있겠지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거 왜 만드니, 하는 물음에 간단명료하게 답할 수 있어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이놈을 잡고 싶다.

아이의 원혼을 달래고 부모의 맘을 달래주고 싶다

-범죄에 관한 이야기인데 스릴러 구조가 아닌 것은 실화에 근거한 흐름을 따르다보니 자연스렇게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분노와 슬픔을 그리는 데 장르가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인지. =후자에 가깝다. 사건 자체는 정말 많이 꼬여 있고 스릴러적이다. 그런데 내가 스릴러영화를 만들 거면, 그렇게 치밀하게 만들지도 못하지만, 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 매끄럽게 장르적으로 할 수 있겠으나 이놈을 잡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극적 상황을 위해서 영화적 재미 요소와 피해자의 심정으로 갈 때 자꾸 부딪친다. 스릴러가 훨씬 재밌을 거 같은데 그러면 이쪽편이 위배되고 충돌된다. 내부적으로 자꾸 자제하고 정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괴로움이 있다. 스타일과 장르에 대해 묻는다면, 스타일과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이야기에 맞는 옷을 입겠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목적과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한편한편 네가 만들다보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스타일이 될 거라며 초심을 잊지 말라고 하던데 맞는 말 같고, 이걸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스타일이다.

-실제와 허구의 비율은. =디테일로 따지면 거의 100% 픽션이지만, 사건의 골격이나 실제 목소리를 쓰니까 반반 정도. 체감으로 더 실제처럼 느껴질 것 같다. 아버지의 직업 등은 모두 바꿨다.

-영화의 사회적 효능에 관한 잣대가 될 수 있겠다. =영화적 진심을 위해 리얼리티, 즉 팩트를 얼마만큼 버리고 가져올 것인가의 경계선에 있는 영화다. 내가 만든 영화가 늘 그래왔지만.

-다큐적인 느낌이 들어가나. =모르겠다. 두 시간 내내 범인의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듣게 될 텐데, 어떤 형태로 영화가 나올지 나도 궁금하다.

-범인의 목소리 연기자가 필요하겠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경기도 말씨를 쓰는 아주 지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다. 결코 흥분하지 않는 지적인 목소리다.

-거기에 더 공분을 느끼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렇지. 감정이 없어 보이니까. 소름 팍팍 끼치지. 그놈 말투가 이렇다. 차를 주차하시고요, 창문 열어두시고요, 트렁크 좀 열어주시고요. 내가 꿈을 꾸는데 그놈이 나보고 시나리오 잘 써보시고요, 영화 잘 만들어보시고요… 한다. 깜짝깜짝 놀란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도 하게 만드나.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있을 때 잘해. 그게 컨셉이다.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가 컨셉이 되듯이. 있을 때 잘해줘, 있을 때 잘할걸, 뭐 이런 거. 우리가 많이 놓치고 살지 않나. 내가 자식일 때나 부모일 때나. 어머니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설정했는데 <신비한 영어나라>의 어머니 같은 느낌일 것 같다. 영어를 잘하게 하기 위해 수술을 시키는 게 자식을 위한 듯하지만 자기 만족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런 걸 모르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그러니 잃어버리고 나면 갑갑한 거다.

있을 때 잘해, 그게 컨셉이다

-아버지의 직업을 앵커로 설정했다. =오랫동안 방송에 있었으니까 사회적 책임이나 생각에 대한 자기 반성일 수 있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MBC 초대 앵커였다. 아버지 모습이 많이 들어가 있다. 어렸을 때 집에 커다란 TV 3대가 나란히 있었다. 맨날 3대의 TV가 켜져 있었다. 보도국 기자 출신의 앵커였는데 이런 아버지에 대한 장면을 영화에 넣었다. 이런 설정이다. 이 앵커는 TV를 통해 세상을 바꿀 힘이 자기에게 있는 듯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좀 이기적인 듯하고. 그런 그가 44일 동안 차 안에 갇혀 범인의 한마디한마디에 일희일비하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고 세상을 새로 보게 된다.

-<너는 내 운명> 촬영 전에 비장의 무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황정민이라고 했고 재평가받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됐다. 이 작품은. =무기라고 했을 때 상업적이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데 무기가 많다. 어쨌든 범인의 목소리가 있고, 영화 전체가 무기다. 잘될 것 같아서 무기라는 게 아니고 핵심 포인트는 범인을 잡자는 거니까 영화 자체가 무기가 될 수밖에.

-자동차 추격신이 많다고. =공간이 한정돼 있다. 범인이 전화를 해서 아빠한테 요구조건 세 가지를 건다. 전화는 세번 울릴 때까지 무조건 받아라, 경찰에 신고하지 마라, 신고하면 죽는다, 7천만원을 준비해서 카폰 달린 차에 타고 있어라. 그러면 집에선 엄마가 협박전화를 기다려야지, 차에선 아빠가 기다려야지. 두 사람이 각각 집과 차 안에 갇혀 공간이 나뉜다. 그리고 수사본부의 삼각형 구도인데 그 사이 협박전화를 받고 돌아다녀야 하니까 거리신이 많다.

-주요 촬영지는. =피해자 집이 강남이다보니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 등이 많고, 김포공항과 충무로 등 서울 시내 안에서 뺑뺑이를 돈다.

-거리 통제가 힘들겠다. =몇몇 장면에서 차가 갑자기 방향을 전환하고 잠복차량 역시 이를 급히 따라붙어야 하니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이를 해결할 모종의 방법을 준비 중이다.

-지금이 몇고째인가. =200고쯤 되지 않을까. 15년 됐는데. 200고 된 시나리오가 뭐 이래, 하면 어쩔 수 없고. 사실 그래서 꺼내기 더 어려웠던 작품이다. <너는 내 운명> 끝나고 처박혀서 썼는데 몇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내 운명> 때와 비교하면 영화 내부의 변화는. =호흡이 좀 빨라지지 않을까 싶다.

-<오빠> 같은 주제곡을 정했나. =정해야지. 영화에 <지구특공대> 노래가 나오긴 한다. 슈퍼맨 하늘을 난다. 원더우먼 지구를 지킨다….

-다음 영화도 실화가 되나. =당분간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 나를 꾀는 죽이는 시나리오가 없다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에 관한 영화겠지. 에로스, 아가페 별별 사랑이 있는데 결국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못하겠다고 생각하거나 그 얘기 뭐하러 해, 라고 안 하는 이야기나 못해라고 어려워하는 이야기 같은 걸 하고 싶다. 워낙 상상력이 부족해서 실화에 의존한다는 게 콤플렉스이기도 하고. 그래 나 말고 없는데 뭐 어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단점이자 장점이다.

-실화와 영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대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나. =놀라울 정도로 없다. 현실에서 영화 같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 이야기인즉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도 있지만 현실 자체가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적이다,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아니다가 헷갈리는 시대가 된 것 같다. 다만 실화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이 있을 거다. 내가 꾸며대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거나 그럴 능력이 없는 거겠지. 꾸며낸 이야기는 일단 내가 재미가 없다. 왜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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