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이미지의 기억들이 있다. 세살 때 봤던 김포공항 상공 위의 불꽃놀이의 영상, 산타클로스로 변장한 미군 병사가 과자를 나눠주던 모습, 거적때기 위에 앉아 구경하던 유랑극단의 공연. 하지만 내가 실제로 봤다고 믿는 이미지들 중에는 정체가 수상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동네에 살던 무당이 굿을 하는 장면. 내 기억 속의 그녀는 무릎 아래가 잘린 채 피를 줄줄 흘리며 장단에 맞춰 미친 듯 춤을 추었고, 그 집 뒷마당에서는 연탄화덕에 얹은 커다란 양은 솥 속에서 그녀의 잘린 두 다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삶은 다리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까지 기억한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목격한 것 중에도 이상한 것이 있다. 어머니가 살던 마을에 귀신 들린 집이 있었는데, 귀신 들린 집이라 그런지 그 집 남정네들은 6·25 때에 모두 몰살당하고 과부만 남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 집 귀신들은 장난도 심하여,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그 집 옆 미루나무 가지에는 김장으로 담근 김치 포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도 희한한 기억을 갖고 있다. 아내의 머릿속에는 종종 한 아이가 욕조 속에 코를 박은 채 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다. 나이가 들어 장인어른에게 무심코 ‘혹시 어린 시절에 누가 욕조에 빠진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게 바로 너였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제 뒷모습을 봤다는 얘기가 아닌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눈으로 볼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대답은 ‘그 영상은 의식의 바깥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 의식이 만들어내 바깥으로 투사한 이미지’라는 것이다. ‘상상력’이 왕성한 어린 시절, 머릿속으로 꾸며낸 관념을 생생한 시각상으로 바꾸어 밖으로 투사한 뒤, 이것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잖은가.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비슷한 일이 인류의 유년기에도 있었다. 어디까지 가상이고 어디까지 실재인지 분명하지 않았던 그 시절, 유년기 인류는 가상을 조작하여 실재를 통제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만들었다. 풍만한 여인의 조각상이든, 동굴의 벽에 그려진 동물의 그림이든, 최초의 이미지들은 주술적 상상력으로 빚어져 마술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영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역시 머릿속의 관념을 스크린에 영상으로 투사하여 그것을 마치 실재처럼 지각하는 장르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어린이나 원시인들과 달라 스크린에서 보는 영상은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구별이 늘 분명한 것은 아니어서, 예를 들어 한기총에서는 영화 <다빈치 코드>를 현실에 대한 진술로 이해한다.
이성이 덜 발달한 어린이나 원시인의 이미지는 ‘주술적 상상력’의 산물이고, 스크린이나 모니터 위의 영상은 장치로 빚은 ‘기술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 상상력의 바탕에 깔린 기술을 이해함없이 그저 이미지만 받아들이려 한다. 이때 대중의 태도는 ‘주술적’인 것이 된다. 가령 황우석 감독의 영화를 관람하는 지지자들의 태도를 생각해보라.
정치도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불분명한 잠재성(virtuality)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모양이다. 하얀 종이와 검은 잉크로 된 텍스트(‘정책’) 대신에 보라색과 초록색의 영상이 선거전을 이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미지 대신 정책”이라 외치는 모양이다. 그들은 전여옥의 의원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 “이미지도 이미 현실이다.”
“이미지로 성공한다면 그것도 발전이다.” 강금실 전 장관의 말대로 정치적 소통의 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변해가는 것도 ‘진보’다. 다만 바탕에 텍스트(‘정책’)를 깔지 않은 이미지는 선거의 정치를 주술적 의식(儀式)으로, 대중의 태도를 마술적 의식(意識)으로 바꾸어놓는 퇴행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