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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잘라낸 기억 박혀버린 기억
김현정 2006-04-28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무것도 없다. 기억이 남아 있는 서너살 무렵부터 2, 3년 단위로 이사를 다녔고,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를 돌아다니다가, 열다섯살이 되어서야 전주시 효자동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아파트에서 5년을 보내며 나는 풍경이 변해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묘목이 자라 나무가 되었고, 화단의 철쭉 덤불은 해마다 꽃송이가 늘어났고, 냇가에 한두 마리 찾아오던 물새는 조그만 떼를 이루었다. 거기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궁금해졌었다. 태어난 곳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었을까, 다른 아이들처럼 헤어지는 일이 서운해 울기도 했을까, 가끔은 누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무언가가 갖고 싶어졌지만 그 사이 부모님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철쭉이 없는 아파트로.

몇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세는 일을 포기하면서 내가 배웠던 건 버리고 잊는 법이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하얀 양변기를 잊었고, 오렌지색 몸뚱이에 분홍색 코가 붙은 기괴한 생김새였지만 오래 가지고 놀았던 곰인형을 버렸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들은 도와 시를 넘어 이사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논산 아이들은 (당시 지명으로) 이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이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왔다고?”라고 다시 물어보곤 했다. 아이들 세계의 이민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떠돌면서 내가 간직한 거라고는 표준어와 충청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뒤섞인 기묘한 말투뿐이었지만, 분통 터지게도 세 가지 방언 중에서 제대로 하는 건 한개도 없었다.

그런 사실이 서운하기도 했었다. 누군가가 “너는 어느 초등학교를 졸업했니?”라고 물어오면 그 학교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40초쯤은 지체해야 했는데, 그나마 방학을 빼면 두달밖에 다니지 않은, 나의 네 번째 초등학교였다. 하지만 네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겼던 사람의 적응력은 강인하여 대학 기숙사의 여학생들이 향수병에 시달릴 때도 나는 선배들이 사주는 술을 마시며 마냥 즐거워했다. 버리고 잊는 덩어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십대의 기억을 통째로 잘라냈고 첫사랑도 지웠고 대여섯명이 한방에 뒤엉켜 자던 대학 시절 5년도 두고 왔다(학점이 모자라서 일년을 더 다녔다). 지금 고개를 돌려보면, 내 뒤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내 뒤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나는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기억과 추억을 길게 끌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천성이 그런지 떠돌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바람에 모래가 쓸려올라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온 시간들 사이에는 돌덩이처럼 굳게 박혀 있는 기억 몇 가지가 있었다. 한밤중 운동장에 퍼져 있던 등나무 잎의 청량한 향기,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앉아 뿜어내던 친구의 담배연기, 동아리방에 모여앉아 부르던 노래, 습관처럼 버리고 다닌 줄 알았는데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기억들. 그 기억들이 있으므로 나는 이제 비굴하게 추억에 매달리지 않고 매몰차게 과거를 끊어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늘은 나와 같은 날 면접을 보고 들어온 동료가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