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떨어진다 해도 상관없어요. 나는 또 한번 거부당하는 것뿐이니까요.” 최고의 춤꾼을 뽑는 리얼리티 쇼 <유 캔 댄스>의 오디션 현장. 누가 봐도 그의 춤은 형편없다. 동작은 어설프고, 박자도 안 맞는다. 당연히 탈락. 그런데 떨어지고 나서 하는 말이 이렇다. 이봐, 좀 뻔뻔하지 않아? 그런데 묘하게 이 한마디가 가슴을 친다. 왜냐하면 그가 ‘뚱뚱한 흑인’이기 때문이다. <유 캔 댄스>는 탈락이 확실한 그의 무대를 오래 보여주진 않는다. 대신 오디션을 보기 전 별 볼일 없는 그의 일상을, 그리고 오디션에 떨어진 뒤 비를 맞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늘 ‘거부당하는’ 뚱뚱한 흑인. 이것은 미국 리얼리티 쇼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뚱뚱한 흑인, 영화 <플래시댄스> 같은 성공 스토리를 꿈꾸는 웨이트리스. 모두 춤을 출 수 있고, 그중 한명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 미국의 리얼리티 쇼는 그들 사회의 계급·인종적 지형을 대표할 만한 캐릭터를 잡아낸 뒤, 그것을 그들의 성공신화와 연결시켜 출연자와 비슷한 계급·인종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몰입감을 준다.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의 아내였던 제리 홀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남자를 찾기 위해 벌이는 ‘캡트맨’이나 미국사회에서 좀처럼 여자에게 인기없는 괴짜를 뜻하는 ‘긱’(Geek)이 등장하는 <뷰티 & 긱>은 이런 계급적 욕망을 더욱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미국 리얼리티 쇼의 리얼리티란 미국사회의 ‘리얼리티’다. 같은 오디션을 소재로 한 한국의 리얼리티 쇼에는 이 ‘리얼리티’가 없다.
SBS <슈퍼스타 서바이벌>이나 KBS <서바이벌 스타 오디션>의 출연자들 중엔 괴짜도, 오디션에서 100번쯤 떨어진 구제불능도 없다. 출연자들은 심사를 통해 이미 ‘젊고 반듯하고 예쁜’ 출연자들로만 선발됐고, 모두 출연자들의 노래나 연기를 보여줄 뿐 출연자의 캐릭터를 보여줄 시간은 주지 않는다. 프로그램을 차별화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뿐이다. 그 점에서는 출연자들의 역량을 시청자가 직접 판단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서 출연자를 탈락시키는 <서바이벌 스타 오디션>이 심사위원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슈퍼스타 서바이벌>보다는 긴장감이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몰입할 캐릭터 없이 그들의 경쟁을 그저 관찰만 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은 이미 꾸며지고 만들어진 ‘연예인 지망생’일 뿐이다. <서바이벌 스타 오디션>에서 탈락한 한 출연자의 말대로, 그들은 탈락한다 해도 ‘다른 좋은 작품‘에 출연할 뿐, 시청자의 일상으로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미국의 리얼리티 쇼와 비슷한 경쟁 구조를 들여온 이런 리얼리티 쇼가 지금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경쟁 시스템은 가져왔으되 그들처럼 우리의 ‘리얼리티’는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