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 연기 보고 이 녀석 배우 되겠다고 생각했다”
-미영 할머니 역의 나문희는 대사 한마디 없이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휼륭하게 지켜낸다. 말갛게 쳐다보는 눈빛이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하나만으로도 완전 무장해제당할 정도로. =나문희 선생님과의 인연은 데뷔작 <엄마의 치자꽃>부터 시작되었는데 건강할 때의 우리 어머니 모습하고 너무 비슷하신 분이다. 이 배우가 사랑스러운 건 그 경력에도 여전히 생짜라는 거다. 아직 매 순간순간이 서투르다. 나는 귀신같이, 무당같이 연기하는 배우가 무섭다. 그래서 나문희 선생님의 설익은 모습이 좋다. 농염하고 완숙하면 곪아버리는 단계밖에 안 남은 거니까. 대부분 그 나이쯤 된 배우들은 어느 정도 이야기하면 “그래, 무슨 말인 줄 딱 알겠어”라고 하지만 나문희 선생님은 한결같이 “고민할게, 연구할게”라고 말하신다. 이 역을 제안했을 때도 “이 사람 말간 느낌이 나야 하는데 내가 너무 탁해졌어. 그래도 고민할게”라고 하셨다. 배역의 집중도가 너무 심해서 미영 할머니처럼 현장에서 거의 말을 안 하신다고 스탭들이 걱정할 정도다.
-김민희는 ‘이정재의 여자친구’라든지, 패셔너블한 연예인으로서는 인식됐지만, 어느 순간 배우로서는 암묵적인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처럼 보였다. <굿바이 솔로>는 김민희란 배우만 놓고 봤을 땐 실로 ‘부활’ 혹은 ‘탄생’의 드라마다. =처음엔 이 배우를 잘 몰랐다. 우연히 모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참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기민수 PD와 캐스팅을 놓고 고민하던 중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럼 한번 만나는 보자, 고 해서 봤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다. 두 번째 봤을 때 한 시퀀스 정도 준 것뿐인데 혼자 미리라는 캐릭터를 연구해서 왔더라. 정형화된 연기는 아닌데 날것의 느낌이 신선했다. 그러던 어느 밤 김민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우가 먼저 전화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용기를 냈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남자배우 캐스팅 때문에 보류상태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기다려야겠네요. 하하.” 분명 웃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김민희는 전화기 너머 그전부터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천정명이 캐스팅되면서 김민희가 합류하게 되었다. 10회에서 호철(이재룡)이 딴 여자와 혼인신고한 것을 듣고 처음으로 분노하는 장면을 편집실에서 보면서 이제 이 녀석 배우 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이제 민희 얼굴 보기 힘들겠네”라고 농담을 했더니 부끄러워하더라. (웃음)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다. 한 남자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람도 있다. 왜 우린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못할까? 그래서 왜 이 순간의 행복을 끝없이 방해받을까?” - <굿바이 솔로> 수희의 내레이션
“다음 작품은 방송 전에 100% 완작을 내놓을 거다”
-또 하나의 드라마를 세상에 내놓았다. 품고 있던 자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만감이 교차 할 것 같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작가적 한계를 많이 느꼈다. 더이상 대본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1차 대본 마무리를 하고 나서는 내가 나를 칭찬하고 있다. 대본은 안 밀리고 줬고(웃음)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의 열정을 쓰다듬어주었다. 가진 거 퍼먹은 게 아니라 공부해서 먹고산 것 같아서 뿌듯하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건 늘 고통스러운데, 질문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스스로 칭찬하는 거다. 이번엔 이 정도밖에 안 됐지만 다음에 더 잘할 거다. 대신 실수한 건 잊지 말고 기억할 테고.
-오랜 파트너였던 표민수 감독이 현재 MBC에서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연출 중이다. 서로 모니터를 해주고 있나. =표 감독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다. 지금은 한창 바쁘니까 주로 표 감독 부인과 통화를 한다.
-다시 함께 작업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일단 올 겨울에 데뷔작인 <엄마의 치자꽃>을 연출해주셨던 박복만 PD와 단막을 한편 할 계획이고, 이후엔 표 감독과 미니시리즈를 할 예정이다. 2년 뒤쯤? 어쩌면 더 이후가 될 수도 있다. 작가가 방송 전에 100% 완작을 해야 연출도, 배우도 고민할 시간이 있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미완성의 작품을 내놓기에는 이제 핑곗거리가 떨어졌다. (웃음) 적게 먹고, 소박하게 살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7년 전 <바보같은 사랑>이 끝나고 처음 보았던 모습보다 더 야위긴 했지만 훨씬 편안해 보인다. =가족 때문일 거다. 10년을 혼자 살다가 처음 아홉 식구에 편입되고 나서는 힘들었다. 초반에는 만날 짜증나서 울었다. (웃음) 하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정말 행복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특히 중·고등학교 다니는 조카 녀석들에게 많이 배우고 산다. 마냥 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녀석들에게 고민 상담을 할 정도다. 얼마 전에 시청률이 잘 안 나오는 게 맘 상해서 조카에게 “속상하다”고 했더니 그 녀석이 이러더라. “음… 먼저 고모가 시청률에 연연해한다는 사실이 정말 의외야. 그런데 일단, 자요, 자고 얘기해….” 나는 예전에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무시했다. 5살만 어려도 그 배우하고는 말도 안 하고 ‘애들은 다 빠가(바보)야’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내가 바보였고, 그렇게 빠가 같았던 나를 미워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 역시도 치졸한 부분이 있고 그 아이들 역시 완숙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나도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면 누나처럼 그렇게 명쾌해지나?”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 - <굿바이 솔로> 민호와 영숙의 대화 중
<굿바이 솔로>는 20대 젊은 연인부터 중년의 남녀 그리고 노년의 어머니까지 여러 세대의 주인공들이 고루 이야기의 키를 쥐고 간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른의 입장이 되어 충고하기보다는 아이가 되어 계속 질문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 보인다. 10여년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이야기하던 애늙은이 서른살 작가는 이제 “흔들릴까?” “다리냐 흔들리게?” “수희가 택배도 아니고 보내긴 어딜 보내” “지켜? 감기로부터 지켜?”처럼 흔히 쓰는 단순한 대사들이 왜 시작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신인 같은 마흔살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묻고, 우리는 그 순진무구한 물음에 대답을 찾지 못해 번번이 멍하니 맥을 놓고야 만다. 지금 노희경의 드라마는 무덤이 아니라 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완숙한 어른이 아니라 점점 더 ‘생짜’가 되어간다. 이 동행길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비단 당신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