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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자들
2001-08-22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100인위(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에 대한 내 주변의 이런저런 ‘객관적인 논평들’에 답답함이 쌓일 무렵, 오랜만에 만난 ㅅ선생이 물었다. “김규항씨, 100인위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물론 지지합니다.” “내가 <한겨레>에 쓴 칼럼 봤어요.” “못 봤는데요.” “지지한다고 썼는데 얼마나 욕들을 하는지 몰라.” “100인위의 방법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비판과 토론으로 고쳐나갈 일이지 방법상의 문제로 100인위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바보들이죠.” ’그러게.” “100인위뿐 아니라… 늘 그런 식인 것 같습니다.”

크든 작든, 역사의 한편은 늘 ‘논평자들’의 차지다. 화사한 진보적/자유주의적 교양인인 그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선 늘 ‘객관적’이다. 논평자들의 관심은 문제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나 문제의 해결에 대한 논평이다. 논평자들의 목적은 실은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핑계로 방법상의 문제를 찾았다.”

논평자들은 이른바 ‘역사적 해석 공정’으로 말끔하게 정련된 역사에 매우 능숙하고 적극이지만(그들은 교양인인 것이다), 온갖 군더더기와 비루함이 드러나 보이는 ‘역사의 일부로서 오늘’엔 늘 거슬려 한다. 역사보다 역사의 미감에 집착하는 그들은 역사를 모르는 어떤 사람보다 역사에 무지하고 어리석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논평자들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논평했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어 조선 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논평의 실제는 이렇다. “일본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건 어리석은 꿈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강준만씨를 필두로 한 <조선일보> 반대운동(강준만씨 이전에도 민언련 등의 성실하고 조직적인 언론개혁운동이 있어왔지만 ‘보수상업언론’이라는 주제를 <조선일보>로 축소조정한 건 강준만씨다. ‘한놈만 패는’ 강준만씨의 전술은 결국 이 운동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이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이던 시절, 다시 말해 <조선일보>에 분명한 반대견해를 밝힌 지식인이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고작 ‘대여섯’에 불과할 무렵, 논평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논평은 역시 같았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운동이 ‘대통령도 하는 운동’이 되고 ‘공익 캠페인’이 되자, 논평자들은 짐짓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편에 점잖게 앉았다. 그들은 홍세화, 김정란, 진중권 등 ‘대여섯’이 처음에 그랬듯 “이제야 이 문제에 개입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강준만씨에게 감사한다”는 따위 촌스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오늘 그 자리에 앉은 건 어떤 종류의 실존적 결단도 아닌 그저 오늘 그 자리가 더 편해서다. 강준만이 ‘무식한 인간’이 되고 진중권이 ‘성격파탄자’가 되고 급기야 김정란이 ‘마녀’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논평자들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또한 그들의 관심영역 밖이다.

언제나처럼, 논평자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에 논평중이다.(이 문제엔 누구도, 이를테면 강준만 등 <조선일보>문제에 가장 올발랐던 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의 문제에 가장 올발랐던 사람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엔 논평자일 수 있다. <조선일보>문제를 최종 도착지라 여긴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역사의 상당부분은, 몇몇 몽상가들의 어리석은 꿈이 주변을 둘러싼 논평자들의 훼방을 무릅쓰고 ‘어느새’ 현실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얻어진 역사의 열매는 물론 ‘모두’에게 배분된다.

역사는 늘 그런 식이고, 그럼에도 역사의 한편은 늘 논평자들 차지이며, 역사가 계속되는 한 빌어먹을 논평도 계속된다.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