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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신상옥 감독 [2]

납북과 망명, 그러나 쉴새 없는 영화열정

그러나 늘어난 제작비와 다수의 영화를 제작하는 데서 오는 경제적 압박감은 신필름 역시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신상옥은 간절히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했고, 홍콩과의 합작을 시도한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1964년 <달기>로 시작한 신필름과 홍콩 쇼브러더스와의 합작은 성공적이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합작을 통해 신상옥은 한국과 홍콩은 물론 아시아 시장까지 겨눌 수 있는 장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만주활극에 서부영화의 플롯을 접목시킨 일명 ‘만주웨스턴’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합작영화로 제작한 <마적>(1967)은 국내보다 홍콩에서 크게 성공했고, 최근 재해석되고 있는 <무숙자>(1968)는 이 영향권에서 제작됐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장르 개발도 신필름을 심각한 재정난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영화의 완성도는 점점 더 떨어져갔고, 정부와의 불화는 신필름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그리고 1975년 <장미와 들개> 중 검열된 ‘2초’간의 장면이 예고편에 삽입되면서, 결국 신필름의 등록이 취소되어버린다. 국내에서 영화를 만들 길을 잃어버린 신상옥은 홍콩에서 다시 재기할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곳에서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지옥화>

<로맨스 빠빠>

1978년 1월4일, 홍콩에서 최은희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납북된다. 그 뒤 최은희의 구출계획을 모색하던 신상옥 역시 같은 해 7월19일 납북된다. 그는 5년간 감금되었고, 수차례에 걸친 탈출시도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이때 그의 몸에 사용된 오염된 바늘로 인해 간염에 노출되었다고 최은희씨는 증언한다). 그러다 1983년 최은희와 재회하면서 그는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설립하고, 그의 말을 빌리면, “난생처음 남의 돈으로” 다시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그는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7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소금>으로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되어 최은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소금>의 성공으로 해외영화제 참가가 가능해진 1986년, 신상옥과 최은희는 여행 도중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신청하며 탈출하게 된다. 미국에서 머물던 10여년 동안 그는 쉬지 않았다. ‘신프로덕션’(Sheen Production Inc.)을 설립해<닌자 키드> 시리즈를 제작한다.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에서 <마유미>(1990)와 <증발>(1994)을 연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영화를 만들 수만 있다면 제발로 북한으로 갔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신상옥은 단 한번도 자의로 영화 만들기를 멈춘 적이 없다. 그에게 그것은 숨쉬기를 멈추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렸던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 제목은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이었다. 그것은 장르영화를 섭렵한 신상옥의 대중성을 조망하면서 사극영화 중심의 작품 선정을 통해 그의 일관된 작품세계를 부각해 작가로서의 신상옥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현재 영화학도에게 신상옥의 작가성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장르영화가 작가성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상옥은 작가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의 영화는 독특한 스타일도, 지독한 고민의 흔적도 부족해 보였고, 그가 누렸던 상업적인 성공으로 인해 오락성만이 부각되어왔기 때문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만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작가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온 신상옥 감독은 어떤 시나리오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숨김없이 자랑했으며, “관객이 보지 않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며 대중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면서도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면 관객이 들지 않는다”며 아쉬운 소리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한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인 듯하다. 관객이 들지 않으면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끝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현재 부산영화제에서 회고전을 맡고 있지만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을 준비하는 영광을 갖지 못한 나로서는 신 감독님과 만남을 가질 기회가 딱 두번 있었다. 한번은 영상자료원에서 정창화 감독의 회고전을 준비할 때였다. 갑자기 신 감독님이 나타나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 열심히 하라는 말씀만 하시고는 곧장 필름에 매달리셨다. 그것이 미개봉으로 남은 신 감독님의 유작 <겨울이야기>였다. 필름을 자료원에 보관시키고 이따금 오셔서 직접 편집을 고치고 계시다는 말씀을 직원을 통해 들었다. 이미 개봉이 끝난 영화도 영감이 떠오르면 재편집을 불사하시는 분이 미개봉 영화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싱겁게 첫 만남이 끝나고 다시 뵙게 된 것은 합작영화를 준비하면서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그때는 막 수술에서 회복된 상태였다. 마르고 불편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인터뷰가 진행되고, 이용관 부집행위원장이 질문을 했다. “홍콩과 합작했던 이유가 아시아의 영화맹주가 되고 싶으셨기 때문은 아니었나요?” 잠시 정적, 그리고 짧은 웃음이 흐르며 “그랬지”라고 대답하셨다. 그 순간 신상옥 감독의 눈은 반짝였다. 그것은 당시 아시아 영화맹주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지금도 나는 되려하고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영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었고 “영화에 대한 욕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그의 욕심은 많은 친구와 더불어 더 많은 적을 선사했다. 솔직히 한국영화의 중심에서 맹주로 군림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영광과 더불어 불명예도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늘 존경하는 입장에 서는 이유는 그가 만든 수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영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병약한 몸에서도 반짝임을 잃지 않았던 그의 그 지독한 “현역의식” 때문이다. 그는 늘 현역이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현역감독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신상옥 감독의 죽음은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 진 것이 아니라, 그가 이제 비로소 현역에서 물러나 진정한 한국영화의 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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