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우쭐했었다. 사진 잘 찍는다는 말을 몇번 들은 뒤였다. 칭찬을 그저 겸손으로 받아들였으면 좋으련만. 그는 그런 성품을 애당초 갖지 못했다. 게다가 평소 자신의 밥벌이 재주에 의문을 품고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저질렀다. 그래, 가는 거야. 난데없이 받은 박수에 취해 100만원 넘는 보급형 DSLR(일안반사식 디지털카메라)을 무작정 샀다. 이후 주위의 만류에도 월급을 고스란히 렌즈 수집에 쏟아부었다. 카메라를 바꾸기만 하면 걸작을 찍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헛된 꿈이었다. 총을 이제 막 지급받은 신병처럼 한동안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허둥댔다. 낑낑대면서 후회했다. 이전에 쓰던 똑딱이 카메라가 하루에도 수십번 그리웠다. 비싼 카메라인데도 손떨림은 더욱 심했다. 피사체는 언제나 유체이탈 심령 같았다. 이쯤해서 자존심 버리고 옛날 연인에게 돌아갈까. 그러기엔 새 연인에게 쏟아부은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고수들을 우연히 만났다. 온라인 갤러리에서였다. 아니, 내 카메라랑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 저렇게 다른 사진이 나온단 말야? 그들의 비기가 궁금했고, 질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콸콸댔다. 넘어서기 위해선 한발 물러서서 한수 배워야 하는 법. 둘러보니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디카 강호의 고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누구를 찾아가야 하나. 사진 찍어 돈 버는 이들이나 사진 전공자는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실력은 프로, 태생은 아마추어만으로 골랐다. 서울과 춘천, 두곳에서 셔터를 날리기로 유명한 네명의 고수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꼭 웃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은 버려라탄광촌 찍는 ‘소년’ 김정수씨의 비법
왜 ‘소년’인가. 온라인 갤러리를 둘러보면 ‘뽀사시’한 사진 일색이다. 어떻게 저런 화사한 색감을 냈을까 호기심이 일면서도, 몇번 들춰보면 달디 단 사탕을 빠는 일처럼 좀 지겹다. 그러던 중 검은 먼지 날리는 탄광을 배경으로 한 ‘소년’ 김정수씨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연작에 단박에 사로잡혔다. 투박하지만 생기가 돌았고, 단순하지만 힘이 끓었다. 작가들 혹은 사진 전공자들만 주로 찾는 곳이라 여기는 탄광촌. 그곳에 작은 디카를 들고 간 ‘소년’의 용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소년’은 어떻게 고수가 됐나. 2002년, 제대 뒤 복학을 앞두고 있던 김정수씨. 심심하던 차에 가족 앨범을 꺼내 보다가, 오래된 흑백사진 한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모님의 연애 시절 사진이었다. “결혼 전에 두분이 이렇게 사셨구나.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났다. 그 사진의 힘이 뭔지 궁금했다”는 그는 곧장 와인바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40만원으로 하이엔드급 디카를 샀다. 무엇을, 어떻게 찍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찰나 우연한 기회가 찾아들었다. 인사동에서 국제적인 사진가 그룹 매그넘 사진전이 열린 것. “5천원 내고 들어가서 4시간 넘게 사진만 멍하니 봤다. 나오면서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감동을 주면 좋겠다. 그런 의미있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난데없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때다. 다만 이것저것 찍게 되면서 내 생각을 처음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연작은 2004년부터 강원도 도계 탄광촌을 6번 다녀온 뒤 거둘 수 있었던 수확이다. “사진에 대한 갈증보다 사는 게 좀 지루해서 그냥 새벽기차 타고 태백 탄광촌에 간 거다.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쫒겨나다시피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탄광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도계에 들렀고 그곳에서 친절한 광부 아저씨들을 만나서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나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만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망설이던 그를 잡아끈 건 다름 아닌 도계 ‘사람들’. 전화까지 해서 언제 오느냐, 이번에 내려오면 자고 가라는 채근은 그의 발길을 매번 검은 먼지 속으로 이끌었다. “무엇을 찍겠다고 덤볐으면 못했을 일”이라는 그는 현재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취업준비 중이다. “밑바닥 사람들을 오래오래 찍어 그들의 주목받지 못한 삶을 사진 선물로 돌려주고 싶다”는 김씨. 그러고 보니 그의 연작 제목이 사진작가 최민식씨의 그것이다.
디카 고수가 되려면 “세상에 못 찍을 소재는 없다. 처음 보는 대상은 모두 찍을 수 있다. 애써 찾으려고 하지 말라. 카메라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부모님도 좋은 주제가 될 수 있다. 꼭 웃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은 버려야 한다. 남이 찍은 사진을 챙겨 보라. 시내 서점에 가서 작가들의 도록을 둘러보거나 동호회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좋은 교감의 기회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1년 정도 혼자 찍었는데 내 세계에만 빠져 있게 되고 얼마 뒤면 싫증이 나게 된다.”
상상력을 발휘하라여자 인물 찍는 ‘레이준’ 홍준혁씨의 비법
왜 ‘레이준’인가 ‘레이준’ 홍준혁은 주로 여자 모델만 찍는다. 그런데 그의 프레임은 좀처럼 예쁜(혹은 예뻤을) 모델의 얼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사진도 꽤 있다. 뒷모습만 남겨놓은 사진도 있고, 일부러 초점이 맞지 않게끔 찍기도 하고, 더러는 모델을 흉한 피범벅투성이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동호인들은 그의 사진을 두고 ‘감각적’이라고 부른다. 카메라 앞에 꼿꼿이 세워두고 인물의 전신을 담아야 직성이 풀리는 디카 입문자에게는 괴상한 일이다.
‘레이준’은 어떻게 고수가 되었나 휴대폰 이벤트에 당첨되어 상품으로 200만화소짜리 똑딱이 디카를 선물로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홍준혁씨는 2004년 이전까지 생짜 문외한이었다. “인터넷 보면서 괜찮은 사진을 몇장 흉내내서 찍어봤는데 너무 재밌었다”는 그는 이튿날부터 “어린 대학 신입생들을 모델로 세워놓고” 훈련을 거듭했다. 10년 넘게 살면서도 집 근처 올림픽공원에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게으름뱅이 생활에도 변화가 일었다. “밴드도 해봤고, 컴퓨터 음악 작곡도 해봤다. 근데 오래가지 못했다. 취미는 많았지만 금방 싫증을 냈는데 사진은 달랐다. 인터넷에 사진 올려서 몇번 격려를 받은 것이 힘이 됐는지 지금까지 카메라를 잡고 있다.” 하이엔드급 디카를 산 뒤로 그는 인물 사진을 연출해서 찍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모델과 우연히 사진을 찍게 됐는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많이 말해주더라. 그 다음부터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상황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영화 혹은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홍씨, 또 다른 카메라를 들고 꿈을 이룬 셈이다. “남자보다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여성 인물과 주로 작업해온 그는 아마추어 모델 김해림씨와 연인 사이. “견제가 심해서 다른 여자 모델과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우울한 내면 혹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터라 극단적인 잘라내기도 서슴지 않는 그는 “촬영 끝내고 카페에서 모델과 음료수를 마시는데 입술이 너무 예쁘더라. 그 부분만 클로즈업해서 찍은 뒤로 크로핑은 자주 하는 편”이라며 “지인이나 애인을 찍는 사진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건 보는 사람의 상상을 죽이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아직 학생 신분인 그는 조만간 자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인물 사진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고수가 되려면 “후보정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의 느낌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필름 작업 또한 원하는 효과를 위해 특수 현상을 하곤 하니까. 노출이 오버됐다거나 초점이 맞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다음 촬영 때 메우면 된다. 포토숍 등과 같은 후보정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 학원까지 다닐 필요는 없다. 두꺼운 포토숍 책도 필요없다. 다만 사진 보정을 위한 기능적인 책을 하나 구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응용해볼 필요가 있다. 책에서 일러주는 수치가 최적은 아니다. 기준은 자신의 느낌이다. 참고로 포토넷(www.photo.net)이라는 해외 온라인 갤러리에 들어가면 후보정 작업을 거친 독특한 느낌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