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영화지 <엠파이어>는 젊은 영국 배우들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며 마치 선언 같은 전문을 썼다. “비록 우리에게는 블록버스터를 만들 만한 돈이 없지만, 재능있는 배우의 부족에 시달렸던 적은 한번도 없다.” 백번 자랑해도 모자랄 것 없는 말이다. 캐리 그랜트,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로부터 키라 나이틀리와 크리스천 베일과 클라이브 오언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재능있는 배우에 있어서라면 제국의 영광을 한번도 손에서 놓았던 적이 없다. 그리고 젊은 영국 배우들이 할리우드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최근 몇년간의 상황을 보노라면, 제국의 영광이 또 다른 진화의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예감을 가능케 한다. 지금 가장 뜨겁게 부상하고 있는 영국 배우들의 현황과 특징을 살펴보고, 오랜 영국 배우의 저력 또한 꼼꼼히 되짚어본다. 각 지방(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별로 뽑아낸 유망주들의 명단은 현재 진행 중인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미래를 따라갈 간략한 항해도다.
※정말 숨을 할딱할딱 내쉬며 기다려질 정도로 멋지지 않아? 배트맨이 웨일스인이라니. ⇒크리스천 베일은 웨일스 억양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아. 대부분의 그의 영화들 보면, 그는 완벽하게 미국인처럼 말해. 그리고 그가 평소에 말할 때는 오히려 잉글랜드 억양처럼 들려. ⇒크리스천 베일은 웨일스인이야. 하지만 억양은 별로 없어. 마치 캐서린 제타 존스처럼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베일의 억양은 상당히 제타 존스스러워(Zeta Jonesish). 아주 영국식으로 들릴 따름이지. 초창기 리처드 버튼 같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들으면 웨일스 억양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웨일스 억양은 굉장히 쿨해. -미국의 어느 인터넷 <배트맨 비긴즈> 포럼 댓글들 중에서-
크리스천 베일에게 세치 혀의 자유가 주어졌다면 도도하게 촌스러운 웨일스 사투리로 적들을 제압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자유가 허락되었을 리는 없다. 배트맨은 미국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 중 하나다. 당연히 오랜 코믹스 팬들은 미국 비자를 가진 배트맨이 고담시를 구원하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베일은 능수능란한 미국 억양을 구사하며 완벽한 브루스 웨인을 창조했고, 모든 인터뷰 석상에서 미국식 발음으로 답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트맨은 미국의 신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신사적 배려였다. 베일의 신중한 접근과 더불어 원작의 기운을 제대로 살려낸 <배트맨 비긴즈>는 곧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죽어가던 프랜차이즈를 부활시켰다. 웨일스 촌구석 남자가 잉글랜드인 집사(마이클 케인)와 경찰(게리 올드먼)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인 악당들(리암 니슨, 킬리언 머피)에 맞서 고담을 구해낸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게임을 조종한 것은 런던 태생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었다. 미국의 영웅은 영국의 재능으로 부활했다.
다재다능한 배우에서 미국의 연인으로
최근 몇년간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영국 배우의 바람은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풍속을 지니고 있다. 주드 로, 콜린 파렐, 클라이브 오언과 이완 맥그리거는 소년처럼 덜 자란 미국의 젊은 배우들과 늙어버린 80년대발 스타들을 제치고 할리우드의 가장 든든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았다. 케이트 윈슬럿, 키라 나이틀리, 케이트 베킨세일은 블록버스터와 고전 각색물을 오가며 미국의 연인이 되어가고 있으며, 조너선 라이 메이어스, 크리스천 베일은 소녀들의 마음을 앗아간 죄로 중형을 선고받아 마땅한 청춘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바야흐로 새로운 침공,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할리우드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단어는 90년대 중반에 이미 미국 언론들에 의해 사용된 역사가 있다. 휴 그랜트, 케네스 브래너, 레이프 파인즈, 에마 톰슨,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로 대표되는 성격파 배우들이 박스오피스와 오스카에서 동시에 강세를 보였고, 당시의 미국 언론들은 “영국인들이 침공해 들어온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숀 빈, 게리 올드먼과 알란 릭맨처럼 근사한 악당으로만 소비되었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배우들과도 달랐다. 매력적인 ‘영국성’(Englishness)의 소유자들. 셰익스피어 각색물과 코미디와 작가영화를 마음대로 오가는 다재다능함은 미국 배우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케이크를 근사하게 만드는 우아한 토핑의 역할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타라기보다는 배우였고, 수백만달러의 몸값을 요하는 거물들도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후예를 자처하고 할리우드 시장을 돌파한 선배들과는 달리, 새로운 영국 배우들은 더 젊고, 더 아름다우며, 더 활기에 넘친다. 시작은 <리플리>(1999)로 미국인의 마음을 훔친 귀공자 주드 로 였다. 마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한 그는 우아함과 경박함이 공존하는 영국산 종마였다. 이전의 영국 배우들이 제2의 마이클 케인과 데이비드 니븐을 꿈꾸는 동안, 주드 로는 새로운 캐리 그랜트로서 대서양을 건너온 것이다. 캐리 그랜트는 사실 불가항력의 힘을 가진 스타다. 그는 액션배우였으며, 히치콕의 히어로였고, 기가 막힌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고전기 할리우드 배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제2의 그랜트가 되기에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레이프 파인즈는 지나치게 우울했고, 휴 그랜트는 로저 에버트의 불평처럼 “전형적인 영국 남자로만 소비”되었다. 누구도 신사의 이면에 브리스틀 노동계급의 기운을 감춘 그랜트의 모호한 매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하나 주드 로에 이어 속속 등장한 영국 배우들에게는 선배들이 갖지 못한 천역덕스럽고 자연스러운 양면성이 있었다. 이른바 할리우드 스타로서의 자질이다. 97년에 영국 배우들의 경직성을 비꼬며 “할리우드의 총아가 되고 싶다면, 로버트 레드퍼드처럼 말을 타고 안장에 올라 채찍을 휘두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일침했던 <뉴욕타임스> 기자가 지금의 클라이브 오언과 콜린 파렐을 보았다면, 총과 검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그들의 모습에 입을 닥쳤을 것이다. <뉴스데이>의 선언처럼 “그랜트의 유산은 영광스럽게 전승된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영국으로 간 배우들
너희만 오니? 우리도 간다!
영국 젊은이들이 할리우드로 향하는 동안, 미국의 젊은이들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다. <엠마> <슬라이딩 도어즈>와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영국인을 연기한 경험이 있는 기네스 팰트로는 결혼과 동시에 런던으로 옮겨서 활동 중이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와 <베니티 페어>의 리즈 위더스푼은 억양 코치를 대동하고 대서양을 건너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마치 앤서니 홉킨스나 게리 올드먼에 감화받은 미국의 남자 배우들이 저마다 음울하고 배배 꼬인 악역에 뛰어들기 시작했던 90년대와 멀게는 더스틴 호프먼이 로열셰익스피어극단으로 유학을 떠났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영국 젊은 배우들의 진화는 할리우드의 젊은 배우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가장 최근의 예는 <오만과 편견>에서 철없는 리디아 베넷을 연기한 지나 말론(<도니 다코> <콜드 마운틴>)이다. 말론은 <오만과 편견>에 출연하기 위해 단신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오디션에 참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영국인 배우들과 영국 억양으로 연기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 발음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극복하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금방 괜찮아졌다.” 키라 나이틀리는 말론의 대담함을 혀를 내두르며 회상한다. “지나는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평상시에도 영국 억양으로만 말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찍고나자 갑자기 미국 억양으로 말을 걸기 시작하는 거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대체 너 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