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B급 야쿠자영화의 명인으로 꼽히던 스즈키 세이준은 스튜디오 경영진과의 잇단 마찰로 10여년간의 칩거에 들어간다. 그랬던 그가 독립제작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1980년 발표한 <지고이네르바이젠>은 일본 영화계에서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였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액션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스스로 극복하고 <살인의 낙인> 등의 야쿠자영화에서 맹아적으로 표현되었던 초현실적 이미지의 실험이 그로테스크하며 동시대성을 담보한 자신만의 강렬한 이미지로 활짝 만개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지고이네르바이젠>은 이후 <아지랑이좌>와 <유메지>와 함께 <다이쇼 로망 삼부작>으로 완성되는데,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비주얼리스트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삼부작을 통해 퇴폐적이고 음울했던 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의 지식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짓눌린 욕망의 뒤틀린 분출을 자신만의 세계와 시선으로, 혼란과 좌절과 희망이 뒤섞였던 불안의 시절에 대한 가슴 답답하고 그로테스크하며 두려움과 공포가 이글거리는 자화상으로 엮어내고 있다. 후반기 스즈키 세이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다이쇼 로망 삼부작>은 이미 일본에서 DVD로 출시된 바 있으나 살인적인 가격과 희소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접하기 어려운 타이틀이었다. 이런 사정 덕에 키노 비디오의 삼부작 북미 출시 소식은 많은 예술영화 팬들을 충분히 설레게 했다. 하지만 출시 이후 정작 키노 비디오는 많은 비난에 직면하고 있는데, <지고이네르바이젠>과 <아지랑이좌>는 화면 정보의 오기로 인해 부질없는 원 화면비율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유메지>의 경우 약속과 다르게 아나모픽 화면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불만스런 화질과 함께 트랜스퍼 과정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붙박이 영어자막과 성의없는 메뉴는 제작사로서의 자질과 성의를 의심받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어, 모처럼 준비된 감독 인터뷰 등 부록에 대한 정당한 평가마저도 평가절하시키고 있다. 방대한 예술영화 카탈로그를 소장하고 있는 키노의 불충분한 DVD 퀄리티는 초기부터 꾸준히 지적받아온 사항이지만, 차세대 매체의 등장마저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서 매체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고 있는 점은 심히 유감스럽다. 워너, 폭스 등이 고전영화의 복원을 신매체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꾸준히 창출해나가는 데 비해 키노의 불성실한 행보를 보고 있자면 ‘예술영화’란 보호막에서 버텨온 시장이 차세대 비디오 시장에서 어떤 입지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어 씁쓸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