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대로 짓고 원하는 만큼 동원하며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거대 서사극은 영화가 TV에 위협받던 1950년대에 극적으로 부활했다. 규모와 호사스러움에서 최대치를 반영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영화가 TV에 대항해 구축한 최고의 무기였는데, 고대 역사와 함께 그 소재로 빈번하게 다뤄진 것은 성서의 세계였다. 그중 구약의 출애굽기와 모세의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십계>는 다양한 인물로 빚어진 풍부한 이야기와 파라오의 도시와 홍해의 기적이 연출하는 장관 등 대규모 서사극의 성공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영화였다. 물론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면모로 인해 <십계>는 이제 와선 시대에 뒤처진 영화처럼 보이며, 한때 할리우드에서 최강의 권력을 자랑하던 세실 B. 드밀은 구시대 감독으로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유치할 정도의 선악 구분, 설교조의 내레이션, 종교적인 경직성. 보는 이에 따라서 충분히 나올 법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십계>를 냉정하게 평가절하할 수만은 없다. <십계>는 수많은 역사영화와 종교영화의 한편이기에 앞서 드밀의 시대에 대한 염려가 반영된 작품이다. 19세기에 태어나 두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그에게 <십계>는 도덕적 타락과 지나친 배금주의에 맞서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이었고, 결국 드밀은 30년의 간격을 두고 <십계>를 두번 연출했다(몇편의 성서영화를 더 연출한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성서의 영화화를 일종의 의무로 여겼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익숙한 1956년판 <십계>보다 1923년판이 오히려 모던한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출애굽기에 충실한 1956년판이 다소 조악한 특수효과를 보여주는 반면 1923년판은 고대와 현대를 섞은 구성이 돋보이고 깔끔하고 소박한 특수효과가 주는 감동 또한 더 크다. 어쨌든 드밀의 진심이 통한 덕분인지 드밀은 유작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감독으로 남게 된다. 1956년판 <십계>의 50주년을 기념해 3장짜리 DVD 세트가 선보인다. 기출시된 일반판·특별판 DVD와의 차별화를 기하고자 이번 기념판은 1923년판 <십계>를 수록하고 있다. 드밀 전문가로 알려진 캐서린 오리슨이 두 판본의 음성해설을 맡고 있으며, 6개의 주제- 모세, 출연진, 파라오의 땅, 파라마운트 세트, 음악, 감독- 로 구성된 다큐멘터리(38분)와 1956년 뉴욕 프리미어 현장(2분), 드밀의 제작보고를 겸한 예고편(10분) 등이 부록으로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