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공연을 맞은 <밑바닥에서>는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이다. 고리키의 희곡은 빈민자 합숙소에 한 노인이 나타나 희망을 전하기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밑바닥에서>는 인물의 이름과 성격만을 남겨둔 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고, 때로는 인물마저 바뀌었다.
5년 전에 실수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들어갔던 페페르는 친구들과 함께 누이 타냐의 술집에서 축하파티를 열고 있다. 그사이 페페르의 연인 바실리사는 백작과 결혼했고 몸이 아팠던 누이동생 안나는 병세가 악화되어 침실에 틀어박혀 지내게 되었다. 그날 저녁 새로 종업원으로 들어온 나타샤가 술집에 도착한다. 페페르는 노래를 잘하고 성격이 밝은 나타샤에게 끌리지만, 백작에게 얻어맞으며 비참하게 살고 있는 바실리사는 페페르를 향한 집착을 거두지 못한다. 이 술집엔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이름마저 잊은 배우와 사기꾼 사친, 자신의 몸을 요구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 들떠하는 창녀 나스쨔 등이 밤마다 모여든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벗이었던 고리키는 <어머니> <외투> 등을 남긴 대가다.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밑바닥>은 무산계급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정치적인 노선보다는 작가로서 복합적이었던 고리키의 내면이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희곡이었다. 그런 작품을 뮤지컬로 각색하기 위해선 스토리와 철학이 단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밑바닥에서>는 시대와 종교와 철학을 근심하던 원작의 사색을 걷어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하는 하층계급의 삶의 굴레를 좀더 통속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고난에 찌들지 않은 유일한 인물인 나타샤가 이끌어가는 이 뮤지컬은 아늑하고 행복한 미래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차없이 삶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선회하곤 한다. 배우는 알코올 중독자를 무료로 치료해주는 병원이 있다는 나타샤의 격려에 힘입어 자신의 예명을 기억해내고 무대에서 불렀던 노래를 재연하지만, 그런 병원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선, 껍데기나마 붙들고 있던 삶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지난 공연보다 20분가량 대본을 늘렸다는 <밑바닥에서>는 요즈음 창작 뮤지컬이 비슷하게 지니고 있는 유머에 대한 강박 때문에 가끔 산만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 세명이 나타샤가 안나에게 들려주는 동화를 극으로 보여주는 몽환적인 장면이 그렇듯,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아도, 있어서 더 좋은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두 시간이 넘는 공연시간에 비해 노래가 적다는 사실은 <밑바닥에서>의 장르를 애매하게 만드는 요인. 타냐의 술집에 도착한 나타샤가 하나씩 사람들을 주변에 끌어모으며 부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봄>은 러시아 민요의 애수어린 정조를 뛰어난 합창으로 살리고 있기에, 더 많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