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꽃이다.” 이 말은 성희롱일까, 아닐까? 이제까지 ‘의식있는 여성’들은 “여성은 꽃이 아니라 인간이다!”고 대응해왔다. 그러면, 남성들은 “꽃이 아름답잖아, 아름답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누가 인간 아니래?” 이처럼, “꽃”에 흥분하는 여성은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예민해 보이지만, 남성의 말은 반박의 여지없이 ‘합리적’으로 들린다. 항의하는 여성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상담한 사례. 중년의 남성 상사가 거래처 사람들에게 자기 부서 여성 직원을 칭찬하는 말로, “우리 아가씨들 참 예쁘죠?”라고 말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여성들은 “부장님, 저희는 예쁘다는 말보다 능력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남자 직원들이 일 잘한다고 ‘얼굴 잘생겼다’고 칭찬하지는 않지 않습니까”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게 ‘피해자’라며 상담(정확히 말하면, ‘억울함’을 하소연)을 청한 이는, 여성이 아니라 ‘부장님’이었다. 자신은 좋은 뜻으로 말한 건데, “어린 여자”들이 거래처 직원 앞에서 자기를 망신시켰다며 ‘상처’받은 것이다.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며, “예쁘다는 말도 못해!”라고 내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최근 빈발하고 있는,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는 삽화들이다. 동시에, ‘끔찍한 성폭력’과 연결된 성문화의 단면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비유대로, 남성이 짐승이듯 여성은 꽃일 수 있다. 문제는 ‘여성은 꽃이다’는 말 자체가 아니라, 이 언설이 작동하는 의미 체계에 있다. 남성은 보잘것없는 이파리나 뿌리인데 여성이 꽃이라면, 이 말은 남성들의 주장대로 칭찬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유통되는 ‘여성은 꽃’이라는 담론의 전제는, 남성은 꽃을 꺾는 ‘사람’이며, 꺾는 행위는 성폭력 혹은 섹스를 의미한다. 꽃은 스스로 이동하지 못하고 사람(남성)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으며, 꺾였을 때 쉽게 시든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사람이거나 꽃일 때는 성희롱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은 사람인데 여성은 꽃이라면, 인권 침해가 된다. 꽃의 운명은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꽃도 여러 가지다. ‘일반 여성’이 꽃이라면, 거리의 꽃은 ‘창녀’로 간주된다. “노류장화(路柳墻花)는 사람마다 꺾으려니와 산닭 길들이기는 사람마다 어렵다”는 우리 속담은, 여성이 꽃일 때 닭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아직까지도 여성은 공적 영역의 임금 노동에 종사해도, 사적(私的)인 존재로 여겨진다. 성희롱, 특히 직장 내 성희롱은 남성이 여성을 사적인 존재로 환원할 때 발생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여성 동료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엉덩이, 가슴 등을 만지는 행위는 그녀를 동료가 아니라 ‘여자’로 보기 때문이다. 남성들에게 사적 영역이란, ‘쉬는 곳’(가정)이나 ‘노는 곳’(유흥업소)을 의미하는데, 이는 ‘어머니와 창녀’라는 여성에 대한 이분화로 연결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직장 여성’은 ‘몸 파는 여성’을 의미했다. ‘남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말은 없다. 남성은 원래 사회적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남성 문화는 여성이 있어야 할 ‘정상적’인 장소는 가정이라고 보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와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을 무의식적으로 ‘훼손된 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훼손된 꽃’인데, 꽃잎 몇개 따는 게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같은 다이어트를 해도 남성은 몸‘만들기’(보디빌딩)지만, 여성은 살‘빼기’로 의미화된다. 몸의 사회적 의미는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가치는 몸이 아니라 그가 사회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에 의해 정해진다. 하지만 여성은 몸(예쁜가, 젊은가)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흑인과 백인에게 ‘검다’는 말,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바보 같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흑인의 피부색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다. 남성은 정신으로 여성은 육체로 여겨져왔기 때문에, 여성의 몸, 외모에 대한 언급은 남성과는 달리 모욕이나 폭력의 문제가 된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는 지난 수천년 동안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 문화의 일부이자 의무와 역할, 민족의 전통이었다. 남성들 입장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당연했던 권리가 어느 날 갑자기 범죄 행위가 된 것이다. 법을 만든다는 국회의원 최연희씨, 술이 원수라며 그를 옹호한 같은 당 정의화씨, “아름다운 꽃을 보면 누구나 그 향기에 취하고 싶다며 미에 대한 본능적인 표현의 자유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개탄한 열린우리당 한광원씨에게 현행법은 너무 급진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