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비디오숍에 가면, 한쪽 벽에는 무협 시리즈가 가득 차 있었다. <영웅문> <설산비호> <소오강호> 등등. 무협지를 읽고 무협영화는 보았지만, 선뜻 무협 시리즈까지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짧아도 10여개, 길면 30여개의 비디오를 보기에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국 어느 날인가 <의천도룡기>를 보기 시작했다. 2박3일간 아무것도 안 했다. 학교도 안 나가고, 잠도 거의 안 자고, 끝까지 봐야만 했다. <의천도룡기>를 본 다음부터는, 무협 시리즈에 두번 다시 손대지 않았다.
그 결심은 얼마 전까지 유효했다. 케이블 채널에서 <천룡팔부>를 보았을 때에도, 다음 회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지 않았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만나면 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하지만 <의천도룡기 2003>을 다시 만났다. 초반을 놓쳤지만 장무기와 명교, 멸절사태와 금모사왕 등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기억이 났다. 한두회를 빼먹고 보아도 바로 내용이 연결됐다. 이미 알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느긋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빠져들었다. 다음 회를 보기 위해서 새벽까지 기다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조민의 캐릭터에 반한 것이다. <의천도룡기>는 원나라를 배경으로, 반원운동을 펼치는 명교의 교주 장무기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정파인 무당의 아버지와 사파로 몰린 명교의 어머니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뒤, 장무기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초를 겪다가 무림의 고수가 된다. 장무기가 어머니에게 받은 중요한 가르침 하나는, 예쁜 여자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웅호걸에게는 수많은 여자가 따르는 법. 주아, 소소, 주지약, 조민 등이 장무기를 사랑하는 여인들이다. <사조영웅문>의 곽정이 사파로 비난받는 황약사의 딸 황용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도 몽골의 왕족이며 반원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무림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민 조민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조민은 자신이 목적한 일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교활한 여인이며, 몽골인답게 잔인한 면도 지니고 있다. 말로는 그 누구도 조민을 이기지 못하고, 복잡한 상황을 예리하게 뚫어보는 통찰력은 단연 최고다. 황용과 아주 흡사한 캐릭터다. 순진한 장무기가 위대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민 같은 영악한 여인이 필요하다. 장무기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조민을 미워하고 비난하지만, 조민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장무기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
내가 조민에게 반한 것은, 그 교활함과 당당함이었다. 의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라면 거침없이 행하는 여인. 황용과 조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여인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반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착하고 여린 주지약은 결국 짊어진 짐의 무게 때문에, 자멸하고 사악해진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보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세상의 착한 사람들이, 제발 조민과 황용처럼 교활해졌으면 좋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