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6. 1. 15일_ 부산대교 난간, 협박하기 vs 버티기
이상도: (황당하다) 에이 갱장님도∼ 지는 그 할배 얼굴 구경도 몬 해봤심니다∼ 알면서…. 도 경장: 이번에는 진짜로 싹쓸이다. 이 말이야. 니 줄줄이 같이 딸리 들으갈래 아이믄 살아나을래? 묵직함 놈 해서…. 내 훈장 타고 계급장 쫌 갈자! 그라모 니 구역은 내 챙기주께! 물준다꼬 연락왔을 때 전화 한통, 고것만 해도! 엉?
“서울 가서 찍어라, 이 미친놈들아.” 반대편 차선에서 차를 몰고 가는 운전자가 소리친다. 황정민과 류승범이 얇은 양복 차림으로 부산대교 난간에 몸을 기댄다.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 속에 두 사람은 어깨동무한 채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렛잇비”라며 노래를 불러댄다. 오늘 촬영은 도 경장이 중간책을 잡으려고 이상도를 협박하는 장면. 황정민은 “생각만큼 둘이 같이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다”고 전했다. 오늘처럼 도 경장이 상도를 설득, 협박, 재촉하는 시퀀스가 대부분이다. 너비 2m의 인도는 수많은 스탭과 장비로 메워져 발디딜 틈이 없다. 도 경장과 상도가 인도 난간에 올라서는 동작을 반복한다. 칼바람 속에 “경치 좋다”고 외치는 도 경장과 입을 삐죽거리는 상도. 거절하는 상도를 도 경장이 김 형사(정우)와 함께 다리 밑으로 던지려 한다. 괴로워하다가 빌고, 빌다가 도망치는 상도의 모습은 웃기면서도 절박하다. 류승범은 “상도는 자기 생각을 내비치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급격한 감정 변화는 드라마에도 힘이 되고 개인적으로는 캐릭터를 풍부하게 해준다”라고 말했다. 상도를 교각 난간에 수평으로 들어올리며 금방 내던질 기세인 도 경장과 김 형사. 카메라가 멈추자 류승범과 황정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교 아래 선착장 화장실을 향해 친구처럼 쏜살같이 달려간다. 운전자들의 항의는 새벽 내내 계속됐고 급기야 경찰차가 도착해 승강이와 교통 통제가 뒤섞인다. 황정민은 “저들 입장에서는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 일을 해야 하니까 매번 로케이션마다 사생결단하는 심정”이라고 밝혔다. 황정민이 난간 위에서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며 촬영은 마무리됐다.
#3 2006. 2. 13_ 감천항, 비상구는 없다
도 경장: (실실 웃으며) 어데 가노… 증거물 다 타뿟는데… 이 새끼 죄를 입증할 유일한 죄인이 어델 가노? 이상도: (어이없다) … 내 드가믄… 같이 죽는데? 잊으셨나요? 갱장님 앞으로 각… 서…?
“계획상으로는 10일인데 원하는 만큼 안 나오면 서울 못 가는 거죠.” 류승범이 말한다. 드디어 <사생결단>의 대미를 장식할 감천항 촬영이다. 황정민은 “감천항만 잘되면 이 영화는 되는 거야. 오늘 그래서 잘해야 돼. 근데 여기가 참 어려워”라고 했다. 감천항은 국가정보원 관할의 세관 지역이라 촬영 허가에만 반년이 걸렸다. 출입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국가정보원의 신원조회가 요구되고 모든 스탭은 촬영 완장을 부착한 채 작업해야 한다. 2월 13일 밤, 수많은 크레인의 조명과 200m 가까이 되는 철조망에 촘촘히 달린 노란색 형광등 조명도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감천항 중앙부두는 <사생결단> 프로덕션과 플롯의 모든 힘이 집결된 승부처다. 마침 이곳에 손님이 찾아왔다. 방문객은 차기작의 헌팅에 나선 <피와 뼈>의 최양일 감독. 가장 긴장되는 촬영을 앞두고도 황정민은 조심스럽게 하드보일드의 거장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는 손때 묻은 콘티북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최 감독의 사인을 받는다. 중앙부두 정면에는 자동차 두대가 땔감처럼 활활 타고 있다. 불길 옆에서 미친 듯이 장철을 걷어차고 짓밟는 상도. 류승범은 “두려운 상대를 겁에 질려 때리니까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다”고 설명했다. 상도를 뜯어말린 도 경장은 반쯤 넋이 나간 상도를 다시 한번 배신한다. 황정민은 “두 사람의 갈등이 마지막으로 폭발하는 정점”이라고 말한다. 누가 죽고 누가 살든 여기서 결판난다.
#4 2006. 2. 17_ 노력파 황배우 vs 감각파 류배우의 <사생결단>
나흘 뒤 다시 감천항을 찾았다. 귀가 떨어져나갈 듯 추운 날씨다. 펄럭이는 차양을 헤치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갈탄을 피운 페인트통 옆의 두 배우는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드럼치는 시늉을 곁들인다. 최호 감독이 “계속 날씨가 추워서 다들 맛이 간 것 같아”라고 했다. 잠시 뒤 류승범은 얇은 모포를 두른 채 긴 대사를 속사포처럼 반복해서 읊조린다. 두 시간 동안 특수분장을 한 류승범의 얼굴은 흠씬 얻어맞은 복서처럼 일그러졌다. 더이상 수다도 환담도 없다. 천막에는 꽤 오랫동안 적막이 흐른다. 류승범이 고친 대사를 황정민에게 논의한다. 황정민은 “끝없이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숙제를 던지면 배우에게 깰 수 없는 벽은 없다”고 말했다. 드디어 뱃머리의 갑판에 선 두 사람. 상도는 무릎 꿇고 도 경장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호소한다. 싸늘한 표정의 도 경장은 발 아래 부두에 선 부하들에게 상도의 체포를 명령한다. 수십분 동안 다듬은 대사가 류승범의 입에서 불처럼 뿜어진다. 화답하듯 황정민의 호탕한 웃음이 울려퍼진다. 천막으로 돌아와 라면을 먹으며 모니터를 바라보는 둘과 최 감독의 얼굴에 잠시 옅은 미소가 지나간다. 일주일 뒤 2월24일에 <사생결단>은 총 74회차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조만간 황정민은 최근 같이 작업했던 모 감독의 판타지 성격이 강한 영화에 출연할 계획이다. 류승범은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오를 생각이다. 물론 그것은 노력파 황배우와 감각파 류배우가 빚어낸 <사생결단>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4월27일 이후의 이야기다.
황정민의 도 경장, 류승범의 이상도
황정민의 도 경장
도 경장은 <바람난 가족>의 영작과 <너는 내 운명>의 석중 사이에 놓일 만한 인물이다. 영화 초반부에 도 경장은 자신의 불행한 삶이 무엇 때문인지 고민한다. 원인은 장철이라는 인물이며 그것은 복수로 귀결된다. 따라서 도 경장의 캐릭터는 직설적이고 선명하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도 명확하다. 한국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와 겹칠 위험이 있다. 그걸 피하려면 정서적인 특성을 찾아야 한다. 관객 입장에서 “형사이긴 한데 보면 볼수록 좀 이상한 사람 같다”라는 반응이 나오면 성공이다. 그런 특성이 너무 확연히 도드라져도 말짱 도루묵이다. 알 듯 말 듯하면서 원래 인물의 성격도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류승범의 이상도
먼저 상도가 겪은 불행한 과거나 심리적 이면에 주관적으로 개입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상도는 어찌 보면 굉장히 불쌍하지만 연민의 요소가 외형적으로 직접 드러나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 이 친구가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하는 이유는 누구를 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도는 자기 정체성이나 자기 감정이 없는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는 한순간에도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따라 움직이고 끊임없이 자기를 합리화할 뿐이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기생하려는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태도와 행동으로 인해 이상도는 악어와 악어새 사이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