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39)이 돌아왔다. <꽃보다 아름다워> 이후 2년 만에 <굿바이 솔로>를 들고 왔다. 한국 드라마 사상 최대의 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2006년 봄에, 일곱 남녀의 사랑이 얽히고 설키는 사랑 이야기로 전쟁터의 한복판에 들어왔다.
이미 95년 극작가로 데뷔하면서부터 노희경은 기존의 드라마들이 구축한 사랑의 이데올로기와 전투를 벌였다.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 소유욕의 만남이고, 그게 영원히 변하지 않고, 그래서 한 가족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게 곧 사랑이라고 당연시해온, 그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면서 노희경이 복원시키려고 한 건 사랑이라는 개념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개인이었다. 곧바로 마니아 팬층이 생겨났고 그는 피시통신 천리안 동호회에서 처음으로 팬 군단을 거느린 작가가 됐다. 한국 드라마는 그의 등장으로 비로소 시청률로부터 자유로운 ‘작가주의’라는 신조어를 인정하고 문을 열기 시작해 인정옥, 이경희 등 이후의 도전적이고 진보적인 작가들을 받아들이게 됐다.
지금 극심한 시청률 경쟁의 한 복판에서 노희경은 여전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중반에 접어든 16부작 수·목 드라마 <굿바이 솔로>는 그의 사랑관, 인간관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니 더 깊어진 듯도 하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그는 말한다. “두번 세번 사랑한 사람들을 헤퍼 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도대체 (상대방을) 지켜준다는 게 뭔데? 지키려면 스스로 지켜야지 누가 누굴 지키냐.”시청률은 낮은 편이지만 노희경의 팬들, 혹은 조금 다른 드라마를 보고 싶어했던 이들은 이런 모습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굿바이 솔로>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인물 설정에 극적인 요소가 늘었고, 20대 초반 젊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며, 미스테리의 구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일부에선 노희경이 달라졌다는 말도 나온다. 그 스스로는 “밥 값을 하는 것과 떳떳한 밥을 먹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로서 주제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 ‘노희경표 드라마’이기보다 ‘잘 만든 드라마’이기를 바란다고도 말한다.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은 걸까. 이제 막 16부 전체 초고를 끝낸 노희경 작가에게서 직접 그와, 그의 드라마의 과거와 현재를 들었다.
‘떳떳한 밥’ 욕심만큼 밥값도 해야겠기에…
시청률 낮지만 작품은 좋은…그런 작가주의는 이제 그만 어린 배우·미스터리 새변화…차기작은 다시 표민수 감독과
촬영 직전 ‘쪽대본’을 급하게 밀어넣는 관행 속에서도 작가 노희경은 일찌감치 대본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20일 만난 노희경 작가는 “오늘 <굿바이 솔로> 전체 초고를 완성했다”며 짐을 덜은 모습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가장 궁금했던 문제들을 썼는데, 아직 답답하고 답을 못 찾은 문제도 있습니다. 다음엔 잘 하겠지요. 드라마의 매력은 그겁니다. 항상 다음이 있으니까요.”
노희경식 사랑관, “사랑은 모순의 충돌”
다른 드라마 작가들처럼 노희경도 꾸준히 사랑을 다뤄왔다. 유부남과의 사랑(거짓말), 동성애(슬픈 유혹), 기혼자들의 사랑(바보같은 사랑), 15살 차이의 연하 남자와 연상 여자의 사랑(고독), 가족간의 애증(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는 일곱명의 주인공들의 제각기 다른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가 이어온 사랑 탐구의 완결편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관점은 남다르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대사들이 의미심장하다. =사랑에 대해 수식어를 늘어놓는 것을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하도 바람을 피워서, 어머니한테 왜 그런 남자하고 사냐고 했더니 ‘사랑하니까’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던 기억이 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명쾌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시점은 현재인데, 드라마에서만 왜 사랑이 영원하다고 계속 우기는가. 그래서 ‘사랑은 그대로라도 사람 마음은 바뀐다’거나, ‘영원히 그 사람만 사랑하는 게 지겹지 않냐’는 대사를 쓰게 됐다.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은 삼각관계에 얽히지만 사랑보다는 자신의 과거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주인공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들었던 <고독> 이후에 자기 검열이 심해진 탓도 있고, 성적인 사랑에 올인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지기도 했다. 거리두기를 해보니까 모순과 모순이 만나는 것이 사랑일지언정, 욕심과 욕심이 만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더라. 초반에는 주인공 셋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두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배종옥(극중 영숙)과 이재룡(극중 호철)이 정신적인 문제를 고백하고, 치유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이번 드라마에서 달라진 모습들도 많이 눈에 띈다. =처음 해본 일들이 많다. 배우들의 나이를 낮췄다. 스물 두살 배우 윤소이를 캐스팅했으며,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초반 중심에 놓았고, 미스테리적인 이야기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이 일곱명이다 보니 압축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속도도 몹시 빠르다. 신구세대 일곱명을 고루 주인공으로 섞어서 모든 세대가 함께 보는 드라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족은 남이다”노희경 드라마가 관습적인 멜로드라마와 다른 이유는 또 있다. 천편일률적인 가족관계로 도배된 한국 드라마 관행에서, 주인공들이 가족을 벗어나려 하는 그의 작품은 참신한 도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꽃보다 아름다워> 같이 헌신적인 어머니가 병으로 죽는다는 신파 소재의 드라마에서도 전통적인 가족 역할보다는 인간관계에 중심을 두어 주목을 받았다.
-주인공들이 모두 집을 나와 혼자 산다. =설정부터 안정적인 결혼에 편입된 주인공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가족관계에서 자식이 받기만 하는 사랑을 배우고, 그대신 부모와 수직적 상하관계를 맺는다. 가족도 좀더 가까운 남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엄마와 딸이 서로 수평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인간관계가 열린다.
-안방극장에서 표현하기에는 쉽지 않은 생각 아닌가. =판타지 작가다, 아니 리얼리즘 작가다 여러 이야기를 듣는데 현실이 척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음모를 꾸미고 서로 망가뜨리는 흉악한 리얼리즘을 좇고, 사람에게 흉악한 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들은 판타지 같은 리얼리즘을 만드는 게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기제로 글을 쓴다. 내 드라마를 보고 사람의 모습은 그렇구나 하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나이 든다는 것노희경 작가는 97년작 <아직은 사랑할 시간> 이후 표민수 피디와 많은 작업을 해오며, 그의 색채를 확립했다. 또 나문희, 배종옥, 이재룡 같은 배우들은 그와 여러 차례 함께 작업을 해왔고, 류승범, 김흥수 같은 이들은 그의 작품에서 배우로서의 전환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면서 노희경도 나이를 먹어 간다.
-노희경이 달라졌다고 하는 시청자들도 있다. =<고독>을 끝내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는데, 시청자들이 나를 배신했다”고 울다가 아는 스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그 이후 3년 동안 매일 백팔배를 드리고, 금강경을 읽으며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드라마를 쓰려고 했는지 반성했다. 시청률은 떨어지지만 작품은 좋다는 의미라면, 작가주의 하고 싶지 않다. 밥값을 하려면 방송사와 시청자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내놓는 게 상업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젊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니까 배종옥씨 역할이 전보다 줄었다고 서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자신의 감정이입은 주로 배종옥씨 역할에 많이 되는 편이다. 극 후반에서는 이 여자가 가진 진짜 슬픔의 원인이 나온다. 남편하고 화해하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나야 당연히 모든 주인공들이 자족하며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나문희씨가 맡은 식당 할머니는 처음부터 이미 다 가진 사람이다.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같은 사람이다. 너그럽게 늙어가는 것이 내 이상이다. 젊은 배우들하고 작업하는 재미도 컸다. 김민희씨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니까 윤소이씨가 언니 좋겠다, 정말 잘됐지, 근데 난 왜 이렇게 턱이 각지게 나왔지? 그러더라. 어떨 때는 바보같다. 열등감도 질투심도 없고. 이렇게 맑고 밝은 젊음이 나한테도 있었나 싶다.
-결말이 이미 나온 거나 다름없지 않나. =주인공들이 자신에게 가장 결핍된 것을 깨닫고 그것 하나만 충족한다. 사랑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자신일 수도 있다.
-다음 드라마는 오랜만에 표민수 피디와 한다고 들었다. =그동안 서로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견주어보는 시간이다. 주제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밥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요즘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노희경이 말하는 노희경 드라마
노희경은 1988년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나와 1995년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공모전에서 <세리와 수지>가 우수작으로 당선되기까지 방송작가원에서 공부했다. 12년의 작가 생활 동안 15편의 극본을 창작, 각색했으며 1996년 ‘백상예술대상’ 수상을 비롯 시민단체와 방송단체에서 10회 이상 수상했다. 다음은 노희경 작가가 밝힌 자신의 창작시기에 대한 촌평이다.
출연진·감독이 말하는 ‘굿바이 솔로’
일곱사람 일곱 빛깔…노희경표 사랑, 형식은 가볍게
왼쪽부터 배종옥 이재룡 윤소이 김민희씨 그리고 기민수 피디
지난 3월1일 첫 방송을 시작한 한국방송 2텔레비전 <굿바이 솔로>(극본 노희경, 연출 기민수·황인혁)는 자신을 사랑하는 데 인색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주인공들이 서로의 관계 맺음 속에서 치유받고 성장하는 드라마다. 사생아 민호(천정명), 결손가정의 수희(윤소이), 날라리 미리(김민희), 건달 호철(이재룡), 말 못하는 미영(나문희) 등 얽히고 설킨 7명이 주인공이다. 각자의 사연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꺼풀씩 벗겨지고, 미스터리 기법을 가미한 장치들(수희에게 오는 이상한 문자 메시지, 실제로는 말을 하는 미영)이 궁금증을 자아내며 흥미를 더한다. 22일 7회까지 방영한 줄거리는 미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난 호철 앞에 다른 건달패들이 나타나 호철을 위험에 빠뜨리고, 민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아내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세상의 편견과 삶의 이중성을 여과없이 뱉어내면서도 사랑에 대한 진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굿바이 솔로>는 4월 20일까지 매주 수, 목 오후 9시55분에 방영된다.
배종옥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의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 과거를 직시하고 치유받고 현재에 잘 살 수 있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아닐까. 이번 작품은 노희경 작가의 이전 것보다 가볍지만 감정의 깊이는 여전히 깊고, 노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심금을 울린다.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드라마다.
윤소이 설정은 영화 <러브액추얼리>와 비슷하지만 한 장면에서 여러 사람들의 느낌이 오간다. 내가 했던 장면 중에선 남자친구에게 니 친구를 좋아하게 됐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장면이, 전체적으로는 나와 김민희, 배종옥씨가 같이 집에서 얘기를 나누던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김민희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 연기를 해봤다. 웃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장면도 있었다. 감정이 풍부한 드라마다.
이재룡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바보같은 사랑>에 이어 노 작가와의 만남이 세번째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힘들면 힘든대로 잘 살면 잘 사는대로 아픔이 있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부모, 형제같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진실을 깨닫고 자신이 사는 삶을 돌아보게 된다. 멋부리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솔직담백하게 쓰는 노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기민수 피디 <거짓말>에선 조연출, <꽃보다 아름다워>에선 공동연출, <굿바이 솔로>로 장편 데뷔를 하면서 노 작가와는 벌써 세번째 호흡을 맞춘다. 이전과 달리 주인공인 등장인물이 여럿이어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 힘 조절이 필요하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동일한 감정선을 갖지 않으면서 희노애락을 보여준다. 반항아 누구 정도로 캐릭터가 얕게 이해되는 것이 싫어 이를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주제의식은 그대로이면서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형식적인 면에서 변화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