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개미가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한다. “어이, 개미들.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작가가 된 뒤 이 이야기를 다시 보니 생각보다 꽤나 섬뜩하다. 개미들은 겨울이 되어 밥을 구걸하는 베짱이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심지어 공격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열심히 일할 때 당신은 뭘 했나요?” 그리곤 끝내 밥을 안 준다(그럴 수가!).
얼마 전 ‘쌀과 영화’라는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쌀과 영화는 언뜻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일하는 전형적인 개미인 농민과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노는’ 영화인들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 스크린쿼터 투쟁의 난점은 “왜 한국영화를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설득력있는 대답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토불이식의 민족주의는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 약발이 다 했으며 반도체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자유주의자들, 비교우위론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정부는 더 나아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것은 “왜 영화를 봐야 하는가? 영화와 자동차(혹은 반도체)를 바꿀 수는 없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를 좀 덜 보더라도 미국시장에 자동차나 반도체를 더 갖다 팔아 일자리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베짱이들은 개미들의 이런 배짱에 속수무책이다. 가끔 나는 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청탁받곤 한다. 그러나 한번도 왜 문학이 필요한지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 소설이나 시를 안 읽는다고 갑자기 가정이 파탄나고 회사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를 안 보고 산다고 혹은 아예 영화를 안 보고 산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는가. 단지 조금 삶이 무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문득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다고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가 밥이냐, 쌀이냐?” 스크린쿼터 축소를 찬성하는 어떤 이의 리플은 개미와 베짱이간의 이 대결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영화는 밥도 아니고 쌀도 아니다. 영화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베짱이들에겐 승산이 없다. 그들은 패배할 운명을 타고났고 해방노예 이솝은 이미 3000년 전에 그걸 알고 있었다. 개미들이 박수를 치고 있을 때야 괜찮지만 정색을 하고 “밥이냐 쌀이냐” 달려들면 언제나 진다. 개미는 베짱이에게 아주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자기가 뙤약볕에서 일할 때 놀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개미는 베짱이의 재능에 매료되면서도 자신에게 없는 그 재능을 질투한다. 개미가 보기에 베짱이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유희에 불과하다. 아무리 최민식이 주연배우는 그만한 대가를 받을 만하다고 울분을 토해도 개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얼굴 몇번 내밀고 몇 억원씩 받다니!’라고 생각하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 같은 것은 슬쩍 외면한다. 그렇다고 그런 개미들을 비난해선 안 된다. 노동 시간과 임금을 대비시키는 것은 인류의 오랜 관습이었고 지금까지도 꽤 많은 곳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개미들은 자판 몇번 두드려서 떼돈을 번 베스트셀러 작가와 CF로 일년에 몇 십억원을 번다는 배우와 스타감독들을 선망하며 증오한다. 추운 겨울 그들이 문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문전박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베짱이들에겐 승산이 없다.
그런 면에서 광대가 궁정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받다가 혀가 잘리고 내쳐진다는 <왕의 남자>의 대박과 스크린쿼터 축소가 겹쳐지는 것은 실로 상징적이다. 예술가들은 어느 날 문득 스스로의 광대적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 밑에서 줄타기를 보는 개미들이 광대가 더 높이뛰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아동심리학자는 오래 전승돼온 옛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 평생 연구해왔다. 그가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아기 돼지 삼형제>나 <호리병 속의 지니> 같은 이야기가 어린아이의 정신병을 줄여주더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는 자기 내부의 욕망을 승인하고 그것을 외부 세계와 화해시키는 법을 배운다. 그는 오래 전승된 거의 모든 옛날이야기의 숨은 심리적 기능을 찬미했지만 오직 <개미와 베짱이>에 대해서만은 그 유해성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그 얘기는 아동이 소화하기엔 너무 폭력적인 결론일 뿐 아니라 어떤 숨은 구조나 패러독스도 없어 그야말로 아이에게 공포심만 심어준다는 것이다. 지금 마음 놓고 베짱이들을 공격하는 개미들, 또 그 뒤에 숨은 ‘왕과 환관’들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