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를 보다보면 괜히 싫은 광고가 하나 있다. 모 이동통신회사의 광고인데 시종일관 금방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아기가 4천몇백만번째 붉은 악마란다. 요즘 괜히 싫은 정도가 아니라 나오기만 하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채널을 돌려버리는 광고가 하나 있다. 이것 역시 모 이동통신회사의 광고인데 웬 멀쩡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명동거리 같은 데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채 노래방에서 7옥타브의 록발라드를 3시간 메들리로 부른 듯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광고다. 것도 홀로!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그때, 나는 폭주족 청소년들에게 오토바이 헬멧을 씌워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폭주족 아이들은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날이면 저마다 오토바이에 태극기를 꽂고 대규모 폭주를 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그들의 평소 행동을 봤을 때 상당히 생뚱맞은 전통이긴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 생일기념 폭주를 하는 것보단 낫다 싶기도 하고 평소에도 제발 대한민국의 훌륭한 청년이지!! 하는 안타까운 맘도 들었다. 아무튼 이들은 당연히(?) 대 한국전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광란의 대규모 폭주행사를 벌였고 우리는 그들을 촬영하기 위해 시청 앞이다, 여의도다 정신없이 쫓아다녔다. 대 독일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서울광장 앞에 있는 호텔의 옥상에서 우리는 촬영을 하고 있었다. 늘 TV에서만 보던 그 붉은 물결을 직접 눈으로 보면 얼마나 짜릿할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고소공포증으로 오는 현기증과는 다른 아찔함을 느꼈다. 통제불능의 광기가 주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내가 그 붉음 속에 있지 않아서였을까? 촬영이 꼬이고 있던 중이라 여러 가지로 짜증이 나 있어서였을까?
실은… 난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한다. 축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하나 강요하듯 한 가지를 정하라면 어이없게 세팍타크로…? 하지만 월드컵이고 우리나라가 너무 잘해주니까 나 역시 멋도 모르고 응원했다. 미친 듯 대∼한민국을 외쳤고 혈액순환이 환갑까지 잘될 만큼 손바닥을 쳤고 승리의 기쁨에 신촌 밤거리를 소금 뿌린 미꾸라지마냥 헤집고 다녔는데…. 나는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내 마음을 붉은 저들에게 들키면 복면을 쓴 몇몇이 날 끌고 가 우리나라가 이기면 훈방조치, 지면 능지처참에 처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외국 나가서 태극기만 보면 가슴에 손을 얹는 애국심 깊은 내 마음이 축구를 좀 덜 좋아한다는 이유로 산산이 찢기는 고통을 맛봐야했다. 흑흑.
앞에서 말한 두편의 광고를 보면 괜히 그때가 생각나 맘이 불편하다. 특히 그 목 쉰 청년은 길에서 날 만나면 날 개 패듯 팰 것 같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 스토리 하나가 생각났다. 나는 토고 최고의 미인 우짤까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우짤까나는 나의 열렬한 구애에도 마음을 열지 않다가 나의 진심어린 사랑에 감동, 미모의 우짤까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이봐 미스터 신! 만일 이번 월드컵에서 토고가 한국을 이긴다면 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 사실을 안 우리 집안에선 두 시간 만에 호적에서 날 파버리고 친구들은 다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두 뺨에 침을 뱉으며 의절을 선언하고…. 그 역경 속에서도 결국 사랑을 택하지만 결과는 ‘대한민국! 토고를 3 대 0으로 대파!’ 자국의 패배에 슬퍼하던 우짤까나가 나에게 건네 마지막 한마디… 꺼지셈!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홀로 코트 깃을 세우고 쓸쓸히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에서…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