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생 동갑내기인 박지연, 김보람, 이주영은 효성고 연극반 동창이다. 대학로 연출가로 활동하는 연극반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기성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 운좋은 세 소녀는 대학로 한쪽의 소극장에서 <외로워도 슬퍼도>를 한달째 공연하고 있다. 공연시간은 7시30분. 극단 ‘느낌’의 막내인 세 사람은 오후 2시께가 되면 극장에 출근한다. 예닐곱명이 비비적거리기도 힘든 좁은 분장실에서 수다를 나누던 셋의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2시50분 낙산씨어터 안
쓸고, 닦고, 붙이고… 우리는 워밍업 중
세 사람 중 가장 조용한 성격의 이주영씨가 빗자루를 든다. 박지연씨는 쓰레받기를 찾아 나섰고, 김보람씨는 종이, 플라스틱, 쓰레기 등으로 분리수거된 쓰레기봉투 자루들을 들고 극장 밖으로 나간 터다. 매일 저녁 배우들이 폭풍처럼 쓸고 지나다니는 무대와 극장 내부는 늘 먼지투성이다. 쓰레기를 버리고 온 보람씨는 어느새 스테이플러를 들고 무대 장식이 떨어져나간 곳들을 손본다. 주영씨는 빗자루에 이어 대걸레를 집어들었고, 지연씨는 페트병에 물을 담아와 극장 곳곳에 뿌린다. 지연씨와 보람씨는 포스터 뭉치가 놓인 곳으로 가서 공연 기간 중 교체된 캐스트의 이름을 일일이 스티커로 붙이기 시작했다. 캐스트가 바뀐 뒤로 매일 하는 작업이다.
3시20분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근처 골목길
포스터 전쟁을 아시나요
“이렇게 붙여봐야 하루도 안 가요. 몇 시간이면 없어져요.” 대학로 길목은 벽마다 포스터들의 전쟁터다. 고교 연극반 시절부터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온 세 사람의 분업은 청소 시간 때처럼 확실하다. 지연씨가 포스터 뭉치를 들고 보람씨가 포스터를 붙이고 주영씨는 스카치테이프를 떼어준다. 70∼80여장 되는 포스터를 언제 다 붙일까 싶은데 “모자라서 다 못 붙일 때도 많다”고 한다. 포스터를 붙이는 코스는 늘 일정하다. 그들이 정한 코스다. 한참 포스터 붙이는 와중에 포스터 떼러 나타난 미화원을 만날 때도 있고, 다른 극단의 막내들을 만나 벽 하나를 두고 서로 긴장하는 것도 일상이다. “오, 살아 있는 포스터를 발견했구먼.” 전날 붙인 포스터가 전봇대 위에 남아 있는 걸 발견하고 세 사람이 놀라워한다. “생존한 애야.” 흐리던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세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눈이 와도 포스터 붙이는 일은 거른 적이 없다는 그들의 손가락이 추위에 얼어온다. “화장실 가고 싶다”는 지연씨 옆에서 식당 야외광고판을 쳐다보던 보람씨가 중얼거린다. “해장국 먹고 싶다….”
5시15분 낙산씨어터 안
“한번만 다시 가주라”
분장실 거울 앞에 지연씨가 제일 먼저 앉았다. 일상에서처럼 극중에서도 꼭 붙어 몰려다니는 여학생 삼총사 역할의 이들은 쌍둥이마냥 양 갈래 땋은 머리를 똑같이 하고 무대에 선다. 무대 위에서는 3월 중 교체될 두명의 새 캐스트가 작가, 연출자와 함께 연습 중이다. “보람아, 바빠?” 연출자가 분장실에 들어가 있는 보람씨를 부른다. “아니오~.” 냅다 달려나온 보람씨는 교체될 배우를 위해 호흡을 맞춰준다. 기성무대에 처음 서본다는 교체 배우에 비하니 보람씨는 중견급 같다. “보람아, 바빠~?” 어느새 사라진 보람씨를 연출자가 다시 부른다. “보람이 분장 들어갔어요.” 연습은 공연 직전까지도 끝나지 않는다. 신인 삼총사가 분장을 모두 마치자 연출자가 오프닝신을 연습시킨다. 지연씨가 대사 치는 타이밍을 지적받는다. 수정된 연기에 오케이 사인이 내려졌으나 지연씨는 불안한가보다. “한번만 다시 가주라.” 친구의 부탁에 보람씨와 주영씨가 기꺼이 호흡을 맞춰준다.
7시15분 낙산씨어터 입구
무대에 깊이 박힌 바위처럼
“미래가 그리 수월치 않겠다는 건 알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세 사람은 똑같이 말했다. “연기 자체가 너무 좋아서” 이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가 아직 어려서인지는 몰라도” 힘든 것들은 그저 이겨내겠다는 생각뿐이라 했다. 공연 시작을 10분 앞두고 극장 앞에 줄선 관객 뒤로 보이는, 옛날 호떡집 리어카 앞에 붙은 포스터 속의 삼총사들 표정 역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