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사, 배우의 얼굴을 가진 이를 찾는 사람들
어느 목요일 저녁, 싸이더스HQ 건물 3층 시사실에서 만난 준비생 및 신인배우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 SM엔터테인먼트의 12인조 프로젝트 남성그룹 슈퍼주니어 1기 멤버들마냥 새파란 꽃미남, 꽃미녀들만 모여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될 것이라는 짐작을 깨고, 1976년생에서 1990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얼굴마다 지닌 개성이 뚜렷하다. 싸이더스HQ 박성혜 이사는 배우의 외모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얼굴이 좋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누가 봐도 예쁘고 잘생겼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일명 배우의 얼굴이란 건 좀 다르다. 조승우나 지진희 같은 경우를 들자면, 그들의 얼굴은 누가 봐도 돌아볼 만한 미남은 아니지만 뭔가 색깔을 입힐수록 그 색깔이 날 것 같고 눈이 깊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이다. 여백이 있고 자기만의 정서를 풍겨야 할 것 같다. 최민수의 카리스마가 되었든, 박해일의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이 되었든.”
매니지먼트사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싸이더스HQ는 전속 연기지도 교사 2명을 두고 신인 및 준비생들을 소그룹 지어 매주 2회씩 연기수업을 받도록 한다. 이곳 소속 준비생들은 목청을 틔우기 위해 판소리 수업도 받는다. 준비생 기간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맺고 나면 회사를 통해 TV드라마, 영화, CF 등 각종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엇을 성취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문제다. 신인이 가진 자질과 가능성과 태도 여하에 따라 매니지먼트사가 계약을 맺는 방식은 다르다. 오디션에 관해서도 매니지먼트사는 말 그대로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다. 음대를 졸업하고 지인의 소개로 정훈탁 대표를 만나 싸이더스HQ에 들어오게 된 새하얗고 작은 얼굴의 김화주(24)씨는 지나치게 어린 생김새 때문에 오디션 때마다 속이 상해서 돌아온다. “동안이라고 좋아했는데 이젠 콤플렉스예요. 오디션 제안 들어오는 역은 다 20대 역할인데 막상 오디션 보러 가면 저보고 중학생 해도 되겠다 그래요.”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역시 지인의 소개로 싸이더스HQ에 들어온 백도빈(28)씨는 2년간 준비생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해 비로소 계약을 맺었다. “제가 뭘 잘 몰랐을 때는 빨리 현장에 가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지금은 배우로서 준비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그전까지 멋모르고 덤볐다면 지금은 더 조심스러워진 것 같아요.”
공유의 매니저인 이윤성씨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신인 캐스트로 간다 발표나면 그 오디션장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획사 신인들이 다 몰려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매니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회를 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속사에 둥지를 틀고 난 배우 준비생들이 스스로 치러야 할 전쟁이다. 이병헌의 매니저이자 전 팬텀엔터테인먼트 실장 손석우씨는 남들이 좋다는 소속사에 들어온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위안삼고자 하는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기획사에 들어오고나면 자기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가 몇번 주어진다. 그러면 본인이 안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고 있는 건지, 단지 고집으로 버티고 있는 건지. 어느 정도 시간을 쏟아보고 답이 안 나왔을 때는 빨리 돌아서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스물두세살에 들어와서 아무 성과없이 4∼5년 허비하고 나면 그 개인의 생활도 이전보다 악화될 수 있다.”
냉정한 말을 하나 더 보태자면, 매니지먼트 관계자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배우가 되겠다고 회사를 찾아오는 지망생들 중에서 괜찮은 신인이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되레 관계자들은 대학로나 학교 주변에서 소문난 연기력의 배우를 수소문하거나 각종 축제 및 야외 행사를 비롯해 군중이 몰리는 장소를 쑤시면서 ‘배우의 얼굴’을 찾아 나선다. 손석우 실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여의도 둔치에서 100원짜리 동전 찾기”와도 같다. 우연히 괜찮은 인물을 발견한다 해도 선뜻 다가서지 못할 때도 있다. “내 주관일 수 있기 때문에 확신이 안 서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살아가고 있는 애를 흔들어놓는 일이라 조심스럽다. 이쪽 계통이 한번 들어와서 바람 들어가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은 데라 더욱 그렇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나가는 한 남자 관객을 보더니 “어, 쟤 괜찮다” 하던 김정화의 매니저 이은영씨가 말한다. “우리한테는 일이지만 그 애한테는 인생이니까.”
극단, 피 토할 때까지 실전에서 배운다
박근형 연출가의 극단 골목길이 3월3일부터 시작되는 연극 <선착장에서>를 이틀 앞두고 축제 극장에서 무대 조명 작업에 한창이다. “18번 조명!” “이번에는 28번!” 사다리 위에 올라가 주도적으로 상황을 체크하는 배우 아래, 훤칠한 청년이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게 꼭 붙잡고 서 있다. 뭣 좀 가져와라, 여기 좀 붙잡아라, 하는 지시에 따르기만 하는 것을 보니 극단 막내다. 정겨운(24)씨는 2004년 인터넷드라마 <다섯개의 별>을 통해 데뷔한 모델 출신 신인배우다. 드라마 <건빵 선생과 별사탕>에서 왕자병 걸린 학생 호준 역을 맡아 제법 얼굴을 알린 그는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자진해서 대학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싸이더스HQ 들어간 지 1년 반 정도 됐는데 지금까지 들은 말이 ‘목소리 좋다’뿐이에요. 원래 성격은 낙천적인 편인데 자존심이 있어서, 욕심이 생겼어요.” 그는 <다섯개의 별> 공개 오디션 당시 ‘네티즌이 뽑은 얼짱’이 되어 연기할 기회를 처음 잡았다. 주연 역할로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다 떨어졌다고, “절망을 느끼다” 대학로로 왔는데 느낌이 되게 좋단다. “연극이 제일 많이 가르쳐준다고 생각해요. 연기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해요. 꼭 거쳐야 할 곳이었고, 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싸이더스HQ 들어왔을 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야말로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아요.” 입단한 지 이제 두달. 한창 구르고 배워야 할 때 그는 <선착장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연습해오다가 얼마 전 공연을 포기했다. 드라마와 영화쪽에서 각각 조역 제안이 들어오면서 연습 일정이 깨졌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이 보실 공연은 안톤 체호프 원작의 <선착장에서> 입니다. 우리 연극의 내용은… (중략) 공연 시작하기 전에 휴대폰 꼭 꺼주세요.” 이것이 그가 첫 무대에 올릴 대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안내만 하게 됐지만 멋있게 입고 오려고요. 농담도 하래요, 애드리브로.”(웃음)
대학로의 또 한 귀퉁이. 극단 느낌의 11주년 기념 공연 <외로워도 슬퍼도>의 공연장 낙산씨어터 안에서는 7시30분 저녁 공연을 두 시간가량 앞두고 정석원(23)씨가 연습하는 신마다 연기를 지적당한다. 연극학과 출신이지만 기성무대에 서긴 처음이다보니 연습일 뿐인데도 잔뜩 긴장해 있다. 그는 선배 배우의 역할을 물려받아 3월 중순에 교체돼 들어갈 예정인데 후배를 지켜보는 선배 기성배우의 눈빛이 수심에 잠겼다.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 형도 저 때문에 일찍 나와주시고, 다들 저한테 맞춰주시니까. 피 토할 때까지 연습하는 게 목푭니다.”
‘배우’를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
활동 소식이 잠잠한 배우 김정화도 요즘은 극단 골목길의 막내 단원이다. 그는 골목길의 워크숍 공연 <바냐 아저씨>을 준비하고 있다. 3월6∼7일 이틀 공연을 위해 두달을 꼬박 연습하고 버스 갈아타면서 대학로를 출퇴근했다 한다. 혜화역 1번 출구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김석훈이 참여한다는 연극의 포스터가 전봇대에 붙어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정민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3천회 기념 공연에 곧 참여할 예정이란다. “배우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라고 해서 배우라잖아요.” 극단느낌의 막내 배우 김보람(20)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싸이더스HQ의 박성혜 이사는 강조했다. “자기가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배우가 될 수 없다. 자기 노력이 정말 필요한 직업이다. 배우의 자기 관리 능력에 대해 항상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배우 자신의 몫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들을 존중해주고 스타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당신이 연극배우를 꿈꾸건 영화배우를 꿈꾸건 TV배우를 꿈꾸건 배우가 되기 위한 길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배우 준비생들과 여러 관계자들이 배우의 길을 멀고도 험한 길이라 입모아 말하는 이유는 그 길에 완성이란 단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난 당신이 ‘그러니까 배우를 때려치라는 소리로군’하고 생각해도 별수없다. 그 말을 하고자 함일 수도 있으니까. “배우는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자기가 살아 움직여야, 꿈틀대야 한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자기만의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책 많이 읽고, 시장 많이 다니고, 사람들 많이 만나고, 두발로 걸어 방방곡곡 여행다니면서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자기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배우는 그 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연출가 박근형이 배우 되기를 꿈꾸는 당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스타와 배우는 다르다
배우가 되는 길에 들어서기 전 명심해야 할 7계명
여러 종류의 배우 준비생들을 만나면서 “당신처럼 배우를 꿈꾸지만 아직 이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조언을 쏟아놓았다. 한달이 되었건 1년이 되었건 당신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많은 충고를 7계명으로 정리했다.
1. 겉멋에 혹하지 마라 비슷한 또래 친구들이 화면과 스크린에 나오는 것을 보고 화려함에만 반해서 들어서지 마라. 연영과 졸업장? 연기할 때 아니면 쓸모없다. 배우가 된다는 것? 당신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다. 스타가 되고 싶은 것인지 연기자가 되고 싶은 것인지부터 정리하고 와라.
2. 외모를 믿지 마라 장동건, 심은하처럼 생기지 않은 이상 당신의 외모는 다른 사람과 별반 차이 없다. 외모는 믿지 마라.
3. 스스로에게 물어라 막연히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다. 정말 배우가 되고 싶은지, 왜 배우가 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라. 분명한 확신과 대답이 찾아졌을 때 시작해라. 대수롭지 않게 ‘나도 연기나 한번 해볼까?’ 하는 질문은 힘든 과정을 겪어내고 여전히 겪고 있는 우리가 들었을 때 기분 나쁘다. 쉽게 보지 마라.
4. 이런 자질이 요구된다는 것을 각오해라 열정은 기본이다. 오기, 인내심, 사교성, 저항심, 이기심, 겸손함, 부지런함, 자기 통제 능력, 절제력, 사생활 포기. 어정쩡하게 있다 포기할 거면 말리고 싶다.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와라. 그만큼 절실하다면 도전해라. 배울 것 많다.
5.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곳은 냉정한 밀림과도 같은 곳이며 약육강식의 세계다. 당신의 생각만큼 순탄한 곳이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와라.
6. 연기력의 한계를 경험해야 한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는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연기가 안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연기력이 성장을 멈췄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시기를 재차 겪으며 내공을 쌓아야 한다.
7. 연기력만 쌓다 끝나는 수도 있다 연기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기회를 끊임없이 찾아나서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내공만 쌓고 있는 당신을 누가 와서 저절로 알아봐주는 것이 아니다. 훈련만으로 쌓을 수 있는 내공에도 한계가 있다. 에너자이저처럼 살지 않으면 결국 포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