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빅3로 통하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는 연극배우 출신이다. 황정민도 그러하다. 배우가 되려면 연극을 먼저 해야 하는가보다. 김민정, 양동근, 문근영은 아역배우 출신이다. 아, 나는 성인이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배우의 꿈을 접자. 차승원은 모델 출신이다. 전도연은 TV 탤런트 출신이다. 연극영화과 출신이 있는가 하면 국문과를 전공한 정진영, 미대를 졸업한 감우성도 있다. 배우가 되려면 모델을 해야 하나? TV 탤런트를 거쳐야 하나? 길거리 캐스팅될 가능성이 있으니 매니저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만 골라 누벼볼까?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유능하기로 소문난 매니저들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쾌하게 해주지 못한다. 어떤 여배우는 질문을 듣더니 “일단 해주고 싶은 말, 꼭 해야겠니?”라고 농담처럼 되물었다. 갈수록 힘이 커지는 한국영화를 동경하며 배우의 꿈을 품는 사람들은 늘어가는데, 배우가 되는 법에 관한 정답은 배우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현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연기학원 강의실, 연영과 연습실, 매니지먼트사 연기수업실, 극단 등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들을 기웃거려보았다.
그곳에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시, 행시, 임용고시를 치듯 시험을 쳐서 점수를 따는 일이 아닌 이상 배우가 되는 길은 모호할 뿐이다. 별별 배우 준비생들의 현장에서 희망찬 성공담, 밝은 미래 대신 엿본 것은, 불확실한 길 위에 놓인 어떤 현실들이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아니, 영화배우든 연기자든 뮤지컬 배우든 뭐든 간에 연기를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고 싶습니다. 영화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화배우가 되려면 어느 대학, 어느 과를 가야 합니까? 영화배우의 전망과 수입은 어떻게 됩니까? 영화배우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아야지만 될 수 있는 건가요? 정말 연기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저는 중학교 3학년입니다. 꿈은 영화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지 않았을까요? 연예계에 진출한다는 것에…. 고등학교는 예고보다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우선 가려고 하고요, 대학은 중앙대 가고 싶고요(물론 힘들겠지만). 얼굴은… 잘생긴 편은 아닙니다. 물론 못생겼다고 할 수도 없고요. 키는 작은 편이고요… 165cm 정도. 매우 작죠? 연기는 꽤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눈물도 잘 못 흘립니다. 거의 고이는 수준밖에는…. 하지만 신하균씨처럼 되고 싶습니다. 아직 영화배우가 돼보겠다고는, 가수가 되겠다는 저의 절친한 친구 빼고는 말해보지 못했습니다. 집도 좀 못살고요…. 음, 대학가고 그 다음 영화배우가 되는 절차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길어도 좋습니다. 당신의 희망찬 한 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도…. 당신의 작은 관심 하나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도…. 도와주십시오.”
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글이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배우가 되는 법’,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요’ 따위를 검색어로 넣으면 이같은 하소연을 수백, 수천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글은 막연히 꿈만 꾸어보는 게으른 배우 지망생들의 것이겠지만, 위의 한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중 어떤 것은 누군가의 달라질 운명의 길목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달에 40∼50명이 싸이더스HQ 사무실에 프로필을 들고 찾아오고, MBC아카데미 연극음악원에서는 500여명의 수강생이 연기수업을 듣고 있다. 무대에 서고 싶다고 무작정 대학로의 극단을 찾아가는 사람들, 정원 50명 내외의 연극영화과를 목표로 입시 준비에 몰두하는 수험생들. 유명한 모델 에이전시 모델라인은 최근 통신업체와의 합병으로 코스닥에 우회상장하며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의 모델 아카데미·에이전시 사업을 유지하면서 모델라인은 스타급 연예인을 영입해 매니지먼트 사업부를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차승원, 진희경, 공효진, 권상우, 이정진 등이 이곳 출신임만 감안해도 납득 가능한 행보다. 배우로 가는 길은 어느 곳에나 있어 보인다. 배우는 쉽게 꿈꿀 수 있는 직업이며, 배우가 되기 위한 길에 발을 들여놓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아 보인다. 자신감과 열정만 있으면 나도,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연기학원, 배우 준비생 되기 위한 입시학원
“이놈아, 네가 뭔데 네 맘대로 고시를 포기하고 말고 함부로 내뱉는 거야, 이놈아!” 사법고시생 아들을 붙들고 늘어지며 엄마가 역정을 내고 있다. 아들은 아무 말이 없다. 금세 울음을 쏟을 것 같은 엄마의 1분 내외 하소연이 끝나자, 곁에서 지켜보던 젊은이가 지적한다. “지금 대사가 너무 빠르세요. 내용 전달이 하나도 안 되고 되게 급해 보여요. 힘을 줬다가 빼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이렇게 해보실래요? 네가 뭔데 (쉬고) 네 맘대로 포기하고 말고 (쉬고) 함부로 내뱉는 거야 (쉬고) 이놈아!” 연기지도 선생님의 지적에 43살의 여배우 준비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최정득씨는 MBC아카데미 연극음악원 성인고급반 수강생 최연장자다.
올해로 18기 수강생을 모집한 MBC아카데미 연극음악원과 1기생 모집을 마친 SBS방송아카데미 예술원의 수강생 연령 분포를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및 후반이 가장 높다. MBC아카데미 김형찬 실장은 “영화나 드라마 출연, 매니지먼트 오디션, 대학 진학 등을 목적으로 오는 학생들이 많아서 20대 전후 비율이 가장 높다”고 설명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배우 되기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MBC아카데미의 성인고급반 수강생 10명 가운데 7명이 1980년 이전 출생자다. “하는 일 없는 가정주부였어요. 내가 뭔가 할 일을 찾아 하겠다고 하니까 남편도 애들도 다 찬성해줬어요”라는 대학생 학부모 최정득씨가 그리 유별난 수강생은 아니다. 저녁 8시, SBS방송아카데미 예술원의 성인초급반 강의실 바깥 복도에는 40대의 남자 수강생이 의자에 앉아 지난 수업 때 받은 대본을 열심히 읽고 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 수강생은 30대다. 누군가는 이들을 그저 무모한 늦깎이 학생으로 보고 말겠지만 이들에겐 지금이라도 배우의 길에 들어선 것이 기쁨이다. “기회를 못 가졌어요. 경북 안동에 죽 살았는데 연기 공부하려고 일부러 올라왔어요. 가능성이요? 내 노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글쎄, 한 20%?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해요.” 최정득씨는 아직 준비생의 길에 들어서지 않은 지망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겠다고 했다. “너희들도 도전해봐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지지를 힘입어 뒤늦게나마 연기 공부를 시작한 최정득씨는 행복한 경우에 속할지도 모른다. 1981년생인 한 남자 배우 준비생은 5년 전 다른 연기학원을 다녔다가 대학 졸업과 군 제대 뒤 다시 연기학원을 찾게 됐다고 한다. “하고 싶으니까 하겠다는 거예요, 제일 간편한 대답은.” 학원을 다니면서 연기가 점점 느는 것을 느끼지만 “가능성 얘기를 하자면 진짜 그만둬야죠”라는 그는 이 일을 한없이 붙들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내년 정도엔 취직을 하려고요. 사람 구실은 해가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밥값은 벌어야죠. 제가 여기서 잘되어서 데뷔를 한다 해도 두번, 세번 계속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주업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안 그러면 정말 사람 바보 되거든요. 가족들과 멀어지고, 가정 불화의 원인이 되고.”
스물여섯살에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나 외모에 자신이 없어 성우아카데미를 6개월 다녔다는 양태일(27)씨는 “성우 연기를 배우다가 나는 아무래도 목소리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낫겠다 싶어” 연기학원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개성있는 외모에 늘씬한 몸매를 타고 나서 모델쪽 일을 생각했었다는 김혜민(22)씨는 우연히 한 소속사의 연락을 받고나서 ‘배우를 해볼까’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좀더 일찍 배우가 되는 길에 눈을 떴다면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연극영화과, 연기를 배우는 가장 정통 코스
3월6일부터 3일간 있을 신입생 환영 워크숍 공연 <리투아니아>를 준비 중인 동국대 연극학과 45기생들은 밤늦도록 피곤을 이기며 연습에 여념이 없다, 기보다 피곤조차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야식 이야기가 오가는 걸 보니 자정을 넘길 참이다. 01~04학번의 10명 내외 배우들과 97학번의 연출자는 연습실 여기저기에 두셋씩 모여 토론인지 씨름인지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 이 부분은 아까 형이 말한 것과 다르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좋아, 오케이. 그럼 네가 이해한 아버지 캐릭터가 어떤 건지를 말해봐.” 이들은 분명 아마추어이지만 대본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프로들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작품을 만들어 세운다. 안정된 커리큘럼에 의해 훈련된 연극학과 학생들은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발성이나 표정 연기, 동선 잡기 등 연기 기술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다. 연기학원 수강생들보다 몇만 걸음 앞질러가는, 특혜 입은 주자들 아닌가. 4년 내내 바깥 유흥 즐길 새 없이 연극만 하다 졸업할 수 있다. 비록 공연 때마다 제 주머니에서 갹출돼 나가는 공연비를 벌기 위해 시간 쪼개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된 생활의 반복이지만. 연극영화과는 연기를 배우고 싶고 연기를 하고 싶어 안달난 배우 지망생들에게 최고의 장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여기 학교 안에서라도 살아남으려고 다들 열심이에요. 맨 정신으로는 못하는 일이에요.” 워크숍이 끝나면 사흘 뒤 군에 입대한다는 04학번 김태영씨는 두눈을 부릅뜨고 이야기한다. 육체적·정신적 고됨은 가진 것 혈기밖에 없다 할 젊은 학생들마저 지쳐버리게도 한다. 학생들이 갖는 더 큰 문제의식은 다른 데 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연기전공의 02학번 송기중씨는 “현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 가만히 있으면서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면 안 돼요. 그래서 학생들도 두 부류로 나뉘어요. 학교 안에서 실력을 쌓는 사람이 있고, 조금이라도 빨리 밖에 나가서 기회를 찾는 사람이 있고. 대학 4년은 경력이 안 돼도 대사 한마디 하는 단역은 경력이 되거든요.” 군 제대, 졸업 이후 진로와 관련해 생각이 많아졌다는 송씨는 명료한 말로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그래도 남자의 경우는 좀 나아요. 캐릭터도 다양하고 배우가 30대 넘어서까지 할 것들이 많잖아요. 여자배우는 한계가 커요. 당장 졸업해도 24살 2월이에요. 여배우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죠. 밖에서야 이왕이면 20살짜리 가능성있는 신인을 키우려고 하지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의 신인을 캐스팅해서 1∼2년 투자하고 상품가치 만들어서 배우로 쓰려는 데는 거의 없지 않나요.” 연영과 재학생들 중 상당수는 밥상 앞에서 아빠, 엄마가 던지는 숟가락으로 머리 맞아가며 연영과 진학을 허락받고, 수강료가 기백만원 하는 연영과 입시전문학원에 다니며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를 열정만으로 졸업하기도 전에 그들은 또 다른 현실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