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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곤의 감독 데뷔기 [2]
김수경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03-10

촬영 내내 괴롭히던 치통까지 잊게 해준 배우들

“엔딩을 찍던 날인데 무지 이가 아파서 이를 짱돌로 깨버리고 싶더라고. 태어나서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야. 현장에 나가서 진영이한테 딱 한마디 했어. ‘니가 울면 관객도 울고, 니가 건조하면 관객도 건조할 것’이라고. 여섯, 일곱 테이크 가니까 진영이도 속으로 ‘저 씨발놈 오늘도 열번쯤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진영이가 놀랍도록 잘한 거야. 이 아픈 걸 잊어버릴 정도로. 그리고는 승우 순서가 돼서 ‘제작부가 배우를 현장에 갖다놔야지 개새끼들아’ 이 지랄하다가, 승우가 연기하는 걸 모니터로 보는데 눈물이 죽 흐르더라고. 그 순간에 이가 씻은 듯이 안 아픈 거야.”

촬영 내내 김 감독을 괴롭히던 치통은 엔딩 촬영에 맞춰 극에 달했다.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이를 싸안고 감독의자에 앉은 그에게 주연배우들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보답했다. 김승우는 “배우 출신이라 그럴까. 이틀 정도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을 찍으면 하루 정도 쉬게 하고, 극한 감정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을 때는 전날 쉬운 촬영을 잡는 방식으로 대처하더라. 감정신을 찍어야 하는데 추우면 촬영을 연기해주기도 했다. 배우들은 그런 것에 아주 예민한데 그런 부분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전했다. 김 감독에 의하면 “김승우는 초반부에 순간적으로 낚아채는 집중력의 소유자고, 장진영은 끝까지 그걸 물고늘어지고 버티다가 잡아내는 막판 스퍼트가 강한 타입”이라 그것을 적절히 조화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파이란>과 <보고 싶은 얼굴>의 차이점?

“<파이란>은 완전한 나만의 창작이 아니다. 송해성 감독이 원안에서 하고 싶어했던 ‘서로 마주치지 않는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테마가 있었고 나는 그것이 불가하다고 봤다. 파이란은 강재에게 연정을 가질 수 있다. 그나마 그 감정도 오지에 떨어져 아무도 기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의 대상으로 강재를 연모하는 일, 실상은 자신의 체면에 가까운 것이다. 강재 입장에서는 한번 부딪치고 150만원을 챙긴 대상인 파이란을 보고 무슨 사랑을 느끼겠나. 강재의 교양의 강도를 보니 <파이란>은 멜로가 아니라 강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고를 보면 파이란이 죽어 있으니까 ‘얘 참 안됐다’ 이러는데 그건 거짓이다. 그래서 내가 쓴 것은 ‘형, 얘 예쁘지?’ 이러면 ‘에이, 씨발 치워. 아침부터 송장 보여주고 재수없게’ 이렇게 갔다. 기획사에서 난리가 났다. 김 작가가 와서 수필처럼 아름다운 책을 욕으로 쓰레기로 만들어놨다고. 내가 기획사 일곱명한테 혼자서 개총을 맞았다. 그래서 송 감독에게 다시 물었지. 그러니까 송 감독은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더라고. 투표를 했는데 기획사 애들은 다 반대했고 제작자, PD, 감독, 배우는 다 김해곤이래. 그래서 결국 송 감독이 내가 잡은 방향으로 갔다. <파이란>과 비교하면 <보고 싶은 얼굴>은 영운과 연아를 포함해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난함을 느끼거나 스스로가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더이상 침잠되기를 바라지도 않아. 강재처럼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15년 살아야 할 절박한 처지의 사람도 없어. ‘왜 사냐?’ 친구가 물으면 ‘나 나중에 어떻게 되나 보려고’ 이런다고. 누구 하나 강재처럼 온몸으로 살거나 비굴하게 생존하려 하지 않아. 이 친구들은 누구도 리더가 되려 하지도 않고, 누가 잘난 척하면 무조건 끌어내리고 틈만 나면 서로 씹고 즐겁게 살아. 일탈적 유희에 가깝게 살아가는 거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보고 싶은 얼굴>이 썼다면 분명 <파이란>이랑 전혀 다르다고 했을걸.”

시나리오 데뷔작 <파이란>과 연출 데뷔작 <보고 싶은 얼굴>이 비슷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상한다. 본래 세상을 수직으로 굽어보지 않고 수평으로 절개하는 김해곤의 수평적 인간관에서 창조된 점에서 두 영화는 형제처럼 닮기는 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밑바닥 정서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한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불륜은 누가 누구와 잤느냐 하는 문제다. 그런데 연아는 신혼여행을 떠난 영운에게 떡치는 건 아무렇지 않으니 다정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지는 말라고 한다. 어느 게 더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가?”라고 그는 반문했다. 무겁게 가라앉는 <파이란>과 달리 <보고 싶은 얼굴>은 뻔뻔하지만 ‘오늘을 살자’라는 슬로건으로 즐겁게 생활하는 두 인물의 사랑과 주변인물들의 삶을 경쾌하게 그린다. 걸쭉한 대사와 앙칼진 캐릭터의 시나리오가 밝고 흥겨운 분위기의 화면으로 표현된 것은 김 감독 특유의 인간에 대한 자유분방하고 평등한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 감독은 “<보고 싶은 얼굴>은 질박하지만 웰메이드한 상업영화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보고 싶은 얼굴>은 그저그런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연아가 헤어질 시기가 왔을 때 영운의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니 남편 옷 가져가라, 니 남편 입으로 해주는 거 존나 좋아한다’ 이러면 영운이 찾아와서 연아를 패버려. 이런 게 <보고 싶은 얼굴>의 특징인데 연아는 그때 ‘이 씨발놈 존나 엿먹어라’ 하고 전화한 게 아냐. 내가 이렇게 전화하면 이 새끼 성질이 급하니까 당장 와서 나를 팰 것이라고 연아는 예측하는 거야. 도저히 헤어질 수 없으니까 더러운 정, 더럽게 떼겠다는 심사인 거지. 헤어지겠다는 자기 방식의 결심 같은 거야. 평상시 같으면 악을 쓰고 대들 텐데 죽은 사람처럼 대주고 맞거든. 영운이도 패고 나와서 옛정 때문에 밖에서 펑펑 운다고. 그러고는 자기 마누라한테 전화해서 연아 욕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모든 남자들이 이중플레이를 할 때 이런 식으로 해.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어떤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겠다는 거야. 다른 어떠한 남녀 문제를 다루는 영화하고 <보고 싶은 얼굴>이 징하게 다른 점이 이런 거야. 나는 연출자로서 그 끝을 보겠다는 거야. 남자가 이별이나 이중플레이를 할 때 얼마나 비열한가.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인간 개인으로 돌아갈 때 누구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까발리는 거야.”

4년간 틈만 나면 몸을 섞고 헤헤거리면서도 절대 그 여자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중생활을 하는 비겁한 남자 영운. 그 남자를 보며 그가 결혼할 때까지만 사귀겠다고 결심한 당찬 술집 여자 연아.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그들은 투닥거리고 보듬어가며 꿈같은 나날을 함께 보낸다. 종국에는 “그리고 두 사람은 보고 싶은 얼굴로 남지 않을까”라고 영화는 말을 건넨다. 말랑말랑한 멜로물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치열한 삶을 끌어올리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큰 영화인 셈이다. 가까운 지인은 배우,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감독이 된 김해곤이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그런 소리 하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한테 고소당해”라는 넉살 좋은 김 감독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싶은 얼굴>의 무대인사를 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만 남았다.

김해곤의 17년 영화친구, 김승우

김승우, 그 남자는 아직도 거기 있었다

차를 몰고 촬영장으로 향하던 김해곤 감독이 “승우야, 안전벨트도 못 매던 내가 이렇게 운전하니까 대견하지 않냐?”라고 하자, 김승우는 “형, 나도 이제 1년에 몇 억원씩 벌어”라며 웃는다. 그는 “우리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장군의 아들>로 1990년에 처음 만나 17년 동안, 김해곤의 옆자리는 언제나 김승우의 지정석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김해곤을 “우리 친형이라고 소개하는” 김승우가 그의 데뷔작에 동승한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개런티를 받고도 현장에서 환한 얼굴로 “설마 떼먹기야 하려구? 돈 안 줄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라며 “김 감독이 좋은 감독으로 연착륙하고 17년이 된 우정의 결실을 맺는 작품”이라고 강조하는 주연배우를 발견하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연출과 투자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넋이 나간 김 감독을 대신해 김승우는 짬이 날 때마다 스탭들과 비디오 게임을 함께하고 찜질방을 드나들며 현장을 다독였다. 세트 계약금을 내밀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 수차례 회식을 하면서도 그는 아마 당연한 행동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배우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자회견장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 그는 “스스로 말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진심”이라며 쑥스러워했다.

1998년에 <보고 싶은 얼굴>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던 김승우는 “다시 책을 읽으며 시나리오가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져 김 감독에게 이에 관해 물었다. 김 감독은 “책이 바뀐 게 아니라 네가 나이를 먹은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해곤 감독은 “배우 김승우의 장단점에 관해서는 내가 가장 많이 안다.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직 없었다”며 기대를 갖게 했다.

지난 2월18일 마지막 촬영을 마친 김승우는 나카하라 슌 감독의 신작 <멋진 밤>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씨네21>과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는 나올 거예요”라고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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