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
자전거는 엔진이 없다. 이름 그대로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다. 몸뚱아리의 근육이 기어가 되고 2개의 콧구멍은 2기통 실린더가 되어 순결한 가스를 뿜어낸다. 자전거는 무공해의 동력장치다. 대기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는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투명한 콧김은 분수처럼 새벽공기 속에 솟아오른다. 그 건강한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자전거는 요물이다. 바퀴만 보면 미치도록 굴리고 싶은 욕망의 소유자들을 실어나르기에는 더없이 맞춤한 기계다. 자전거 위에 납작 엎드려 달리면 그대로 몸은 유선형의 물고기가 된다. 그 지느러미와 꼬리로 대관령도 헤엄쳐 건너고 사하라 사막도 저어간다. 자전거 여행은 바람처럼 깃털처럼 떠돌아다니고 싶은 역마살의 씻김굿이기도 하다.
예닐곱살 무렵 내가 아직 자전거를 배우기 전.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전거 뒷잔등은 리무진의 뒷좌석과도 같은 승차감을 베풀어주었다. 그이의 펑퍼짐한 엉덩짝은 그대로 지상에서 가장 든든한 에어백에 다름 아니었다. 덜커덩 덜커덩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굴대 위에서 해사한 웃음을 날리며 바라본 세상의 풍경이란?
뭉게구름, 미루나무, 먼산, 원두막, 누렁이 황소 따위는 눈알 핑핑도는 현기증 속으로 휘감겨 돌았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자전거의 오너 드라이버가 되면서부터 이미 그 황홀경은 사라져갔다. 지금 자동차의 매너리즘에 헛구역질을 느낄 즈음, 나는 가끔 녹슬어 볼품없지만 푸성귀처럼 싱싱한 에너지로 충만한 낡은 자전거를 꺼내 먼지를 털어낸다. 아버지의 뒷잔등에 매달리는 그 쾌감은 결코 맛볼 수 없다. 그래도 자전거 안장은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나를 앉히고 유년의 추억으로 쏜살같이 데려다준다. 하나 과욕은 금물이다. 속도에 집착하면 맛이 가는 수가 있다. 실제로 여기 그 증거가 있다.
자전거의 스피드에 취해 살짝 맛이 간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광고. 미국의 자전거 브랜드 GT의 광고다. 사이클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슬로건이 노골적이다. “쾌속은 우리의 좌우명이다.” 그러나 비장한 캐치프레이즈에 비해 광고표현은 너무나 희화적이다. 회의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얼굴모양새를 보라. 눈길을 주는 순간, 킥킥 웃음이 터져나온다. 얼마나 타고 싶으면 일하다가 자전거 생각만 해도 바람결에 짓눌린 얼굴이 될까? 물론 컴퓨터그래픽의 조화겠지만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요사스런 둔갑이다.
끔찍한 익살말고도 이 광고의 미덕은 또 있다. 철저히 기계적 성능이라든가 품질의 비교 같은 데서 벗어나고 있다. 제품 기능에 머무르는 데서 벗어나 사용의 즐거움, 유희본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달리고 싶은 간절한 충동, 그 터무니없는 열망에서 제품의 드라마는 풍성하게 부풀어오른다. 그러나 광고의 기호적 가정은 다소 억지스럽다. 스피드에 대한 경배가 지나쳐서 인간의 꼬락서니가 저런 꼴로 진화하고 만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욕망이 지극하면 신체가 알아서 반응한다? 마치 원숭이 골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해구신을 먹으면 정력이 절륜해지고 소의 도가니는 관절을 부드럽게 만들고 임산부가 닭고기를 먹으면 닭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뚱맞은 억설처럼 말이다. 어떤 구실이라도 끌어대서 탐욕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 상동기관설이라는 그럴듯한 미신을 제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런 씁쓸한 뒷맛을 상큼하게 가셔주는 묘미가 이 광고에는 있다. 일견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관념들을 그럴듯하게 관계지우는 수사의 극치가 우스꽝스런 비주얼에 숨어 있다. 극도의 과장, 극도의 단순화, 극도의 비유는 그래서 애교가 된다.(광고1).
자전거를 타는 것은 꼭 속도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다. 스피드에 미친 자들은 오토바이를 타면 될 일이다. 6기통 2500cc의 마력이 연출하는 광란의 질주극.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족속들은 할리 데이비슨이나 혼다 NX4를 훔쳐서라도 기어이 타야 한다. 오토바이에는 생짜로 못다 이룬 꿈이 서려 있다. 깨어서 이루지 못한 스피드의 쾌감은 꿈에서 이루는 수밖에 없다. 이런 행복한 젊은이들을 모델로 한 브라질의 오토바이 광고 한편을 보자.
“이들은 혼다 NX4 팰콘을 꿈꾸고 있다.” 그런 카피가 그대로 아이디어가 되고 비주얼이 되었다. 저 아베크들의 몸은 침대 위에 있지만 영혼은 실린더의 장쾌한 폭발음에 묻혀 어딘가를 질주하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 뻗쳐 있는 머리채 모양새가 그들의 꿈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 간절히 원하면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광고는 그런 반응을 기민하게 포착한다.(광고2) 이현우/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