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승부다. 절대 피해갈 수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다보면 언젠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 도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다. 눈을 떠라.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잡아라. 후코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이 시종일관 말하고 있는 바다. 최근 인기절정의 사극드라마 <여인천하>에도 이같이 다분히 도전적인 메세지가 여성호걸들의 입을 통해 브라운관 밖으로 퍼지고 있다. 내명부의 주인이 될 기회를 잡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지략-계략을 포함한-을 동원하는 궁중여인들의 삶을 그렸다해도, 기존의 진부한 사극과는 달리, 여성의 모습을 자못 급진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타고난 운(運)과 총명함, 덕(德)을 갖추었으되 사물이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지 못한 윤비에게 정난정이 정치의 도(導)를 이르는 대목이다. “정치란 내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겠기에 적과도 얼마든지 손을 잡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란 시류에 따라 천변만화의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어제 동문수학하던 문우가 오늘은 정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정치, 바로 내가 살 길입니다.” 이쯤 되면 정난정은 마키아벨리다. 아니, 글은 남겼으되 현실정치의 장에서는 실패한 그 남자보다 술수로는 한수 위다.
<여인천하>는 보고 있노라면 정치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을 지탱시키는 일종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난정이 윤비로 하여금 섭정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이끌고, 윤비가 난정의 도움을 얻어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정치가로 변신하는 모습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을 관전하듯 더욱 짜릿해지는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澎)과 정치적 ‘발떼기’가 난무하는 조선왕조의 정치판을 현대에 대입시키는 재미는 평소 정치드라마를 즐기는 남성관객에게도 공히 어필할 만 하나 주시청자는 역시 여성들. 드라마 시청률의 일등공신이 원래 아줌마라지만, <여인천하>는 주부에게는 물론이고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의 점심 메뉴에도 심심찮게 오른다. 그들이 이 드라마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주, 조연을 망라한 개성있는 캐릭터들 때문. 호평은 그 중에서도 특히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캐릭터들에게 향한다. 그에 비해 <여인천하>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예전의 사극에서 남성들이 차지하던 역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난히 왜소하고 초라하다. 정난정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윤원형만 하더라도 우스꽝스럽고 덜떨어져 보이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민속촌에서 자주 부딪히는 <명성왕후>팀에게 "그 쪽 남자들은 다들 왜 그래"하는 식의 비아냥을 듣기도 한단다. 반면 정난정, 윤비, 경빈의 경우 칼바람이 일 정도의 싸늘한 눈매와 남자라도 벌벌 떨게 할 호령소리를 갖춘 그야말로 '여걸'의 모습 그 자체다. 신분제 사회의 중심을 온몸으로 관통해가는 여인들의 당당한 보무가 여성관객들의 억눌린 심정를 잠시나마 대신 틔워준 셈이다. 캐릭터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 연기자들의 힘도 지대하다. 자신의 음색과 어투에 맞는 대사를 개발해낸 덕에 윤비의 '뭐라'와 '그랬느니', 경빈의 '뭬야', '이런 고얀'등의 대사는 금새 유행어 대열에 끼었다.
김재형 특유의 극단적 클로즈업도 화제. 극의 리듬을 살리고 캐릭터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클로즈업 본연의 역할과 더불어 시청자를 캐릭터와 심정적으로 동화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더욱 극에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연기자들은 죽을 맛. 술 좋아하는 강수연도 얼굴에 뾰루지라도 날까 미련없이 잠자리로 직행한단다.
역사적 사실만으로 딱딱하게 풀어나가기보다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든다는 제작진의 취지는 시청자들의 입맛과도 잘 맞아떨어져 애초 50회로 예정됐던 방영계획은 무한정 늘어났다. 140회, 150회 하는 소문을 들으니, 내년 봄이 돼야 ‘천하의 꿈’이 이루어질 모양. 지난 8월7일로 54회를 맞은 SBS의 <여인천하>는 한달 넘도록 끌어온 회임논쟁을 윤비의 승리로 일단락을 짓고 본격적인 세자 쟁탈전으로 라운드를 넘겼다. 또한 남장여인 장대인(이휘향)의 투입으로 본격적인 경제드라마로 방향전환을 꾀할 예정이다. <홍국영>의 후속인 <상도>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내명부의 뒷얘기만으로는 더이상 이야기를 길게 끌기 힘들다는 제작진의 속사정이 작용했다는 것. 따라서 그동안 별 활약이 없던 능금의 역할이 커지고, 객잔의 자금이 조정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따라 조선시대 정경유착의 실태를 그려나간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등장인물의 대사를 따라하고, <모래시계> 신드롬을 재현하듯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 동네 공원은 무섭도록 한산하며, 매회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4만여명 이상의 접속자들로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등 <여인천하>의 열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브라운관을 쥐고 흔들던 시트콤의 호령은 온데간데없고, ‘사극이 방송가를 먹여살린다’는 푸념 아닌 푸념이 드라마 제작진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진원지인 <여인천하>에서 흘러나오는 진파가 어느 정도 커질지, 좀 있으면 사라질지는 두고 볼 일.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