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춘향전>으로 조선에 발성영화 시대를 열다
2001-08-16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4)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다 조선 고유의 토키를 개발하다

동경에 가보니 한 삼년 만에 만난 쓰치하시는 발성기계로 돈을 꽤 벌어들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시방 생활이 곤란해. 돈을 좀 다오.” 우리가 발성기계를 연구할 때 훗날 무슨 일이 있든 봐주기로 한 신의를 생각해서 자금을 좀 대라는 뜻이었다. 그때 한국에 기계라는 것은 바르보가 하나 있고(프랑스제 카메라. 1924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해의 비곡>을 촬영할 때 일본 기술진이 가져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 아이모도 없었다. 내가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있을 리 없다.

그때 교토에는 촬영사의 소굴, 말하자면 일본의 하리우또(할리우드)다 할 만한 곳이 있었다. 쓰치하시하고 나카가와, 나까지 셋이서 그곳 녹음기사연구회에서 다시 모였다. “우리 식의 특허를 가져보자”는 의지로 착수해 라이트 바르보를 만들어냈다.

그런 연구로 한 삼년을 일본에서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얼마간 손을 놓고 지내는데, 홍순언씨가 찾아와서 극장을 하나 지을 수 있도록 도모해 달라고 했다. 이미 영등포경찰서 옆에 터를 봐두고 있었다. 급한 것은 땅보다도 허간데, 조선사람에게 그것도 경찰서 옆에 극장 허가란 쉬운 일이 아니다. 뒤를 봐줄 사람은 와케지마(원산만 프로덕션 등에 자본을 댄 일본인 제작자- 필자)밖에 없었다. “당신 죽어진 뒤에 무덤에 가서 망주석이라도 꽂아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겝니다”, 포석을 좀 놓은 다음 극장 일을 의논했더니, “이 냥반들아, 양식장(洋式場) 만들자는 게 아니고, 우동장사 하자는 게 아닌데 경찰서 옆에 극장이 되겠는가” 하고 터를 먼저 문제삼았다. 자리문제는 와케지마 명의를 빌려 새 땅을 사기로 하고, 허가도 책임을 져주되, 내가 촬영소를 하나 문 열어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됐다. 이런 계기로 홍순언이는 동양극장 낙성식을 보게 됐고, 나는 경성촬영소를 발족시켰다(경성촬영소는 제작설비와 기술진을 갖춘 최초의 본격적인 ‘촬영소’로서, 영화인들의 집단적인 활동과 인력 재생산에 중심 역할을 했다.- 필자).

<미몽> 현대극 최초의 동시녹음

촬영소는 조선극장 옆동에, 겉은 송판때기고 내부는 방음장치 역할을 한다 해서 신문사에서 지형 뜨는 종이를 발라놓고 시작했다. 첫 작품으로 <전과자>(1934년)를 했다. 각본, 감독 모두 일활 출신의 야마자키가 맡았는데 한국이름으로는 김소봉이다. 김연실, 이경선을 주연시켰다. <전과자>는 원래가 일본의 유명한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무대극으로 여러 번 한 일이 있다. 그때 촬영소 형편은 와케지마한테서 넉넉한 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비 사백오십원에, 필름은 후지에서 시험용 공짜필름을 얻어다 썼다. 마침 후지가 처음 생긴 때라, 이스트(이스트만) 대신 써보라는 뜻에서 거저 준 것인데, 일본서 온 필름이 오죽하겠는가 반신반의했다. 다 돼서 시사를 해보니 뭐 형편없이 나왔는데, 흥행에 붙여도 될 리가 없고 처음부터 배급업자한테 팔아버렸다. 임수호라고, 내 밑에 영사기사 제자로도 있었던 아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사진 흥행을 하고 있었다. 얘가 돈 팔백원에 가져갔다.

<전과자> 끝나고 <홍길동>(1934년), <대도전>은 연달아 흥행 성공했다. 성공을 시켜도 그냥 본전인 것은, 전속 배우라고는 둘밖에 없는 촬영소에 점심 때만 되면 한 오십명으로 불어나는 거다. 영화한다고 해봐야 월급이라는 것도 없고 밥이나 멕여줄까 하던 때다. 캐런(개런티)이 본격적으로 얘기가 된 것은 한 이년 더 지나서 <미몽>(1936년)을 하면서부터다. <미몽>은 현대극으로는 처음으로 거리에 나가 동시녹음 촬영한 영환데, 흥행에도 재미봤다. 촬영소가 자꾸 재미를 봐노니 우리도 월급을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해서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것도 나중일이고 이때야 월급이라는 건 상상도 못하고, 그저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촬영소 들어와서 밥먹고 일 시작하면 전부 달아나버리는 식이었다.

촬영소가 자리를 잡아가는가 싶었는데 <동아일보>에서 급하게 나를 찾은 일이 있다. 독일에서 손기정의 올림픽 영화가 오는데, “일장기를 태극기로 만들어주시오”. “이게 한두 군데여야지, 마라톤이면 오르락내리락 뛸 텐데, 여의치 않으니 내 연구를 좀 해보리다” 그랬는데 이튿날 재깍 기자 검거, <동아일보> 정간!

촬영소에 있으면서도 생각은 밤낮 어떻게 하면 발성영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 연구였다. 와케지마한테는 말을 넣어봐야 돈이 많이 든다고 펄쩍 뛸 것이 분명하니, 우리끼리 성사시키는 것으로 하고, 외국 토키를 들여와봐야 말을 몰라서 손님이 안 드니 한국의 말하는 사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우선 일본에 편지를 보내 나카가와에게 기계를 가지고 나오게 했다. 그걸 천이백원에 사고 각본은 이기세, 감독은 이명우, 내가 카메라를 맡아 <춘향전>을 만들었다. 이때부터가 발성영화 시절이 된다. 예고편도 만들어 붙이고 개봉을 했는데, 단성사 문간에 사람들이 동대문쪽으로도 일렬로 서고, 창덕궁쪽으로도 일렬로 서고 대성황이었다. 이때 여자들이 제일 놀랜 것은 다디미 소리, 대문 째작거리는 소리.

<춘향전> 마치고는 이제 발성시대니 스타디오(스튜디오)가 고쳐져야 되지 않겠는가 해서 기계에 손을 댔다. 제일 먼저 카본 라이트를 없애고 한 오십키로짜리 전기를 들여왔다. 카본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동시녹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 정기회사에 편지를 띄워 베른호엘 프린타기도 들여왔다. 그 전에는 모타 없이 육안으로 들여다보는 식, 무성프린타 기계를 썼다. 이 식이라면 가다가 프레임이 서기 때문에 사운드를 넣을 수가 없었다.

기계를 갖추고 동시녹음으로 한 영화가 <장화홍련전>이다. 큰 텐트에 연못을 만들어놓고 비를 뿌려가며 홍련이 물에 뛰어드는 장면을 백였다. 문예봉이가 장화, 홍련이는 지경순이가 맡았다. 겨울에 치마만 입혀놓고 비까지 뿌리니, 배우들이 들어가다 도로 나오고, 들어가다가 도로 나오고 자꾸 에누지(엔지)를 냈다. 감독이 가만 생각하다가 “돌멩이를 가져오너라. 돌멩이를 집어던지면 카메라 돌린다.” 홍련이가 물로 퐁 빠지면서 쏙 들어가는 건 돌멩이로 표현해버렸다.

같은 무렵에 우리말고는 나운규가 동시녹음을 시도한 일이 있다. <아리랑 삼편>(1936년)을 백일 땐데, 한양영화사에서 돈을 대고 녹음기사는 일본에서 데리고 들어왔다. 운규가 <아리랑 삼편>을 백이다 말고 살려달라고 쫓아들어왔다. “형님, 가장자리가 허옇게 나왔어요.” 일본 기사 놈이 싱쿠로(synchronous) 생각을 못하고 무성영화 식으로 카메라를 돌린 모양이었다. <아리랑 삼편>은 다시 찍느라고 돈도 많이 들었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실패보고 말았다.

쌀 창고를 세트로 <심청전>을 찍다

경성촬영소에서는 명우(이필우의 동생. 형에게 카메라를 배우기 시작해 그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촬영기사로 활동- 필자), 유장산(촬영기사. 이필우의 녹음 조수로 출발, 1960년대까지 활동했던 대표적인 영화인- 필자)이 다 모여서 <홍길동전 후편>(1936년)을 준비했다. 스타디오에서 하지 않고 로케를 나갔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던 영화다. 동시녹음 하기 위해서 밧데리를 한 스무개 금강산까지 지고 갔다. 홍길동이 봉련암을 뛰어노는 장면을 백이는데, 그 넓은 곳에 홍길동이 나타나는 장면을 표현하기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배우까지 모두 합해야 불과 이삼십명이 되는 스텝이 “레디, 스타트!” 하면 감독, 촬영기사, 조수까지 전부 까만 옷을 입고 뛰어가야 했다. “카트” 하면 되돌아와서 카메라 스위치를 끄고 그랬는데, 그 사이에 무려 한 이백자는 필름이 달아났다.

경성촬영소에서는 겨울 두번밖에 못 쇘다. 나오게 된 동기는 와케지마가 운규하고 강홍식이를 스타디오로 불러들여 영화를 만들게 한 데 있었다. 마침 이기세씨가 조선영화주식회사 창립을 도모하면서 와줄 것을 청했기 때문에, 정 이 사람들하고 일을 하려거든 그만두겠다고 강경수를 두면서 나올 수 있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아직 안 되고 막연하니 있다가, 최남규라는 사람 덕분에 일본 들어가서 녹음기도 만들고 기계를 해가지고 왔다. 나오는 길에 이기세씨를 만났더니 이번 녹음기가 아주 좋다고, 안석영씨 감독으로 <심청전>을 해보자고 했다.

명륜동에 정미소를 하나 빌려가지고 쌀 창고를 세트로 해서 <심청전>(1937년- 필자)을 백였다. 경성촬영소 나올 때 따라나온 친구들이 다들 같이 했고, 녹음실 조수로 최인규가 이때 들어왔다. 그래 데리고 있는데, 내가 나가기만 하면 들어와서 베끼고 나가고, 베끼고 나가고 처음부터 행실이 이상스럽다 했다. 결국 나중에 들어온 박기채(1935년 <춘풍>으로 감독 데뷔했고 좌파 영화이론가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일본 동아키네마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이 무렵 귀국했다. 김성춘을 비롯한 많은 유학파 영화인들이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1930년대 영화계 특징 중의 하나다.- 필자), 이재명이 같이들 모의해서 나를 있지 못하게 했다.

이기림/ 동국대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