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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투쟁, 다섯가지 시선 [4] - 홍세화

내부 골리앗들과도 싸워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돌팔매질 때문이다. 돌팔매질이 없었다면 다윗은 여지없이 죽음을 당했을 터이다. 용맹스런 다윗도 돌팔매질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전투에 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 싸움에 대해 불공평한 싸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크린쿼터도 마찬가지다. 이미 365일 중 146일뿐이다. 40%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세계 영화산업의 90%를 장악하고 있고, 한국영화에 스크린쿼터로 내준 40%를 뺀 60%를 거의 독식하고 있다. 이미 많이 먹고 있는데 더 먹겠다는 거다. 거식증 환자가 아니라 독식증 환자의 횡포다.

미국의 부라린 눈에 제풀에 겁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미 투자협정으로 잃는 것보다 얻을 게 더 많다는 경제동물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일까, 정부는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스스로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창동 감독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기용하는 파격을 감행하기도 했던 정부는 우리 문화와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 향유해야 하는 국민적 권리를 스스로 배반했다.

영화인들은 일찍 알았어야 했다. 대학이 산업이 되고 교육이 경쟁력 제고를 위한 장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영화라고 특별한 대우가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을. 더욱이 영화는 종합예술이며 사회 환경에서 독립된 존재일 수 없다. 가령 이라크 파병에서 영화인들 역시 자신의 환경변화를 추론하여 고민했어야 마땅하다. 쌀 개방 문제로 농민이 거리에 나설 때 영화인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바라보았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스크린쿼터 조정이 논의되었을 때마다 영화인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나섰고 국민적 관심과 연대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의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쌀 개방 문제에 시민들이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소비자인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인 지킴이로서의 역량 발휘가 가능하다. 영화인들의 분노어린 항의에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부정적 시선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의견이라고 몰아붙이기엔 영화인들의 사회인식과 참여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즉 고의적인 ‘밥그릇 챙기기’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회인식의 결여에 의한 ‘미필적 고의’가 될 수는 있다는 것이다.

1천만 관객 동원이라는 놀라운 성과에도 스크린쿼터 지킴이로서 동원이 쉽지 않은 것은 영화계 내부가 안고 있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몇몇 영화인들을 제외한 대다수 영화 종사자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의 노고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들의 시상 소감에서나 간간이 치하된다. 그러나 그뿐이다. 영화계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와 잘못된 관행을 극복하려는 진지하고 구체적인 노력은 한국영화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이유로 문화적 다양성을 당연히 주장하듯이, 국내용 스크린쿼터의 필요성도 제기되어야 한다. 다양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제약하는 환경, 특히 관객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고 있는 국내 배급망에 대한 문제다. 스크린쿼터 사수가 한국영화의 생존을 의미하고, 막강한 할리우드에 먹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작은 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의무 상영일수의 보장이다. 이미 몇몇 대형 영화사의 독식은 영화계의 빈익빈 부익부와 함께 한국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힘을 합쳐 외부 골리앗의 횡포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다. 그와 동시에 한국 영화계 내부의 골리앗들과도 싸워야 한다. 내부 골리앗들의 전횡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외부 골리앗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