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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투쟁, 다섯가지 시선 [1] - 강준만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싸고 정부와 영화계가 마찰을 빚고 있다. 여론을 끌어모으기 위해 양쪽 모두 총력전이다. 정부는 스크린쿼터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양보되어야 한다고 하고, 영화계는 스크린쿼터 없이 국가의 미래는 없다고 맞선다. 한쪽은 기세를 잡은 싸움을 물릴 수 없고, 또 한쪽은 이번에 지면 앞으로 싸움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씨네21>은 지난 특집 기사(539호)에서 양쪽의 입장을 제시하되 ‘스크린쿼터 축소 불가’라는 영화계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실었다. 정부의 뒤통수 치기 전술이 지나치게 ‘더티’했고, 이를 전후로 영화계에 대한 일방적인 난타가 자행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일방적인 응원만 할 순 없는 일이다. 지루한 응원은 때론 해가 된다. 정부 혹은 영화계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지 않되 사회적인 이슈에 민감한 더듬이를 갖고 있는 다섯 필자들에게 쿼터 논쟁에 대한 글을 부탁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 실린 짧은 글들은 어떻게 복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거나 독이 될 것이다. 어느 쪽에나.

영화인들이여, 스크린 밖에서도 대중을 감동시켜달라

많은 논쟁이 그렇지만, 스크린쿼터 논쟁도 이른바 ‘빙산의 일각’ 현상이다. 물 위로 드러난 건 스크린쿼터지만, 물밑엔 스크린쿼터와 연결된 다양한 거대 의제들이 버티고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보호주의, 자유무역협정, 한-미관계, 국익, 문화 정체성, 영화 철학, 사회적 형평성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아무리 논쟁을 해봐야 서로 평행선만 달릴 뿐이고, 결국 남는 건 여론 투쟁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쟁점에 대해 찬반 양론만 있는 건 아니다. 스크린쿼터가 유지되건 축소되건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중간파도 있다. 이 중간파에 속하는 사람들도 양자택일 설문엔 어느 한쪽을 택하긴 하겠지만, 이 중간파 정서가 다수 정서일 수도 있을 가능성에 주목해보자.

영화인들의 여론 투쟁은 성공적인가? 시위 때마다 언론의 관심을 끄는 ‘스타 파워’에만 의존할 뿐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략, 전술 자체만 놓고 보자면 영화인들이 노무현 정권에 완패를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노 정권은 강공법 또는 ‘안면몰수법’을 택했다. 스크린쿼터 사수가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 정권 고위 인사의 입에서 영화계를 향해 감히 ‘집단 이기주의’ 운운하는 비판까지 나왔다. 왜 민심은 노 정권의 ‘배은망덕’을 꾸짖는 대신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가? 영화인들의 여론 투쟁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 정권은 스크린쿼터 축소를 발표하면서 ‘4천억원 카드’를 제시했다. 영화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 지원책인지 잘 알고 있지만, 일반 대중의 뇌리엔 ‘4천억원’이라는 단어의 울림과 더불어 노 정권이 성의를 보였다는 것만 남는다. 영화인들은 장동건과 이준기로 대변되는 ‘스타 카드’를 쓰면서 국가·애국주의 정서에 호소하고 나섰다. 묘한 일이다. 노 정권의 스크린쿼터 축소 명분도 국가·애국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크린쿼터 논쟁은 국가·애국주의를 실현하는 방법론 논쟁이란 말인가? 이게 그렇게 격하되어도 괜찮은 것이란 말인가?

만약 대박을 터뜨린 영화감독들이 스크린쿼터를 주제로 영화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런 식으로 만들어도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있을까? 결코 그런 식으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입증된, 놀라운 수준의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관객을 사로잡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런 영화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가?

그건 영화인들의 여론 투쟁이 평소 집단주의적 작업 방식에 기인한 습속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걸로 설명할 수 있다. 단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자기 노래 부르기 무섭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 뿔뿔이 흩어지는 가수들의 개인 플레이 습속 탓에 단결이 거의 불가능한 대중음악계에 비추어볼 때 그건 영화계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영화인들이 갖고 있는 탁월한 상상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인들은 ‘문화다양성’을 부르짖었다. 그래서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에 뜨거운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문화다양성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그것이 왜 국가들 사이에서만 지켜져야 한단 말인가? 국내적으로도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할리우드의 ‘승자 독식주의’와 ‘빈부 양극화’ 법칙이 국제적으로 막아야 할 적(敵)이라면, 그 법칙은 국내에서도 극복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은 ‘영화 대박’을 축하했지만, 대박의 주인공들이 제작자건 감독이건 스타건 국내적 다양성과 상생을 위해 무슨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가칭 ‘다양성과 상생을 위한 연대 기금’을 조성하면서 그걸 투쟁의 홍보 동력으로 삼는 게 어떨까? 직접 돈 내는 성의를 보여도 좋고, 막강 홍보 파워를 이용한 기금 모집 사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건 그런 마인드를 보여주는 평소 실력이다. 국내에서 답습하는 할리우드 게임의 법칙은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면서 국제관계에서만 그 법칙을 거부하겠다는 것에서 대중은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다. 영화인들이여, 부디 스크린 밖에서도 대중을 감동시켜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