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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서 나오는 법
2001-08-16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ta)라면 기원 후 2세기 그리스에서 세계 풍자문학의 전통(“웃음으로 진실을 말하기”)을 일구는 데 크게 기여한 시리아 사람이다. 그의 주요 풍자대상이 된 것은 남들보다 뭔가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부자와 철학자이다. 부자는 돈이 많을 뿐 아니라 돈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돈 부자는 아닐지 몰라도 자칭 ‘진리의 부자’이다. 진리의 부자는 동시에 지혜의 부자이고 진실의 부자이다. 그러나 루키아누스가 보기에 철학자들은 각자 자기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해서만은 서로 결코 합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루키아누스는 일단의 철학자들을 경매에 붙여보기로 한다. 그들의 삶과 진리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도대체 얼마의 값어치로 인정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철학자 경매’(The Sale of Lives)라는 루키아누스의 이 신랄한 풍자문에 따르면, 유명한 견유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 지키는 개 정도의 유용성을 인정받아 은화 두닢(정확하지 않지만 요즘 한국 돈으로 따져 2만원 정도?)에 팔리고, “신(神)은 낮이고 밤이며, 뜨거움이자 차가움이고 전쟁이며 평화이다”라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투스는 사람들이 그 말을 못 알아듣는 통에 ‘판매불능’이다. 가장 비싸게 팔린 것은 소크라테스이다. 그러나 그도 무사하게 팔리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조롱을 한참 받고 난 연후에야 그의 삶과 진리는 20만원(?) 정도의 값으로 경매된다. 맨 마지막으로 팔리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자 피론인데, 그는 팔리고 나서도 자신이 팔렸는지 어쩐지 여전히 회의한다.

루키아누스의 또다른 풍자문 ‘날개 단 메니푸스’(Icaromenippus)에서는 철학자들의 다툼에 진력이 난 주인공 메니푸스가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날개 달고 천국(올림포스 신국)을 방문한다. 올림포스의 대신(大神) 제우스는 천국의 마루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인간들의 기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철학자들의 주장에 가끔 귀기울이기도 한다. 메니푸스는 신들의 연회에 초대되어 갔다가 중대한 뉴스 하나를 접하게 된다. 신들은 철학이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혹은 ‘씰데없는’) 헛소리이므로 인간계에서 싹 쓸어없애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져 지상으로 돌아온 메니푸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임박한 운명을 알린다.

써다보니 짧은 지면이 다한 느낌이지만, 루키아누스를 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철학의 운명에 관해서가 아니라 ‘한국언론의 진실과 운명’에 대해서다. 철학자의 경매처럼 우리가 이른바 ‘주요 신문’이라 불리는 언론조직들을 경매(역사의 판단)에 붙인다면 그 신문들은 몇푼이나 받게 될까? 이 경우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진실’이라 할 때, 그 진실의 값어치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우리 언론의 진실이다. 가장 큰 왜곡은 ‘언론 자유’라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킬 자유이지 왜곡의 자유가 아니다. 곡필아세가 신문의 금기라면 ‘곡필아주’(曲筆阿主: 사주를 위해 붓을 굽히기)는 신문이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대죄(大罪)이다. 그런데 부끄럼없이 그 대죄를 짓고 그러면서 큰소리로 ‘자유’를 외치고, 진실 왜곡과 호도와 은폐를 ‘진실보도’라고 우겨대는 것이 우리 신문들이다.

시민이 생각하는 언론개혁은 신문을 “살리자”는 것이지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시민은 사주더러 신문사를 내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회사는 사주가 소유해도 편집권의 독립과 진실보도의 자유는 ‘사운을 걸고’ 지키라는 것이 시민사회의 요구이다. 입맛대로 기사를 비틀고, 편리하게 인용하고, ‘소문’을 보도하고, 아무 소리나 해대고, 묵살하고, 독자를 영원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 이것이 지금 우리 언론의 비뚤어진 자유이다. 신문이 다수 시민들에게서 손가락질당하고 거부의 대상이 된다는 것만큼 수치스런 일은 없다. 그것은 수치 정도가 아니라 신문의 죽음이다. 신문들이 이 수치와 죽음의 수렁을 벗어나 살아날 길은 아주 간단하다. 신문이 신문다워지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시민은 신문을 권력으로부터 지켜주고 “힘내라”고 격려한다. 시민이 왜 지금 신문들의 ‘언론자유’론에 그토록 냉담한지 생각해보라. “사장님, 힘내세요”라는 소리가 시민의 입에서 나오게 할 때에만 신문은 신문이다. 그 시민을 ‘홍위병’으로 모는 한 “신문은 없어져야 할 사회악”이라는 것이 신문의 운명에 대한 시민사회의 임박한 결론이 될지 모른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